자본의 욕망 그 감옥으로부터의 독립
자본의 욕망 그 감옥으로부터의 독립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4.01.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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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다. 우리 사는 이 지구의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다.”

신영복 교수의《나무야 나무야》를 만난 후, 숲 공부를 시작했고 흙이 상처받지 않을 범위 안에서 손수 자급할 자연물을 일구며 입으로 들어오는 것을 공손히 받아 잘 환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중이다. 흙이 되었다가 나무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는 이 몸조차 자연으로 되돌려 보낼 4원소의 총합이니 스스로 자연물임은 자명하다. 요즘은 삶의 주제가 자본의 욕망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독립이며 무봉無縫의 처음처럼 가벼운 식물성 정서를 지향하는 삶이다.

《더불어 숲》은 책장을 가볍게 넘기지 못한 책이다. 자료를 검색하며 읽다 보니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그동안 읽어온 기행이 찬란한 건축물 중심의 하드웨어라면 이 책은 그 하드웨어 안에 깃든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발견한 시간이다. 이중부정의 문장구조로 독서하는 불편함이 다소 컸지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20년간 영어(의 몸으로 산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의 폐허, 우리가 이고 있는 저마다의 폐허' 등 문장 전환 구조의 필력은 글쓰기의 모본이다. 찾아봐야 할 자료가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상식도 깊어졌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의 마지막 걸작 <겨울 나그네>는 24개의 노래로 된 가곡집인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은 음악이다. 가난과 질병 속에서 서른한 살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슈베르트의 암울한 정서와 서정은 겨울 나그네와 같은 우리 인생을 대변한다.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다시 이방인으로 떠나네. 5월은 수많은 꽃다발로 나를 맞아 주었지. -중략- 그래도 이 어둠 속에서 나는 길을 가야만 하네. 달그림자가 길동무로 함께 하고 하얀 풀밭 위로 나는 들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네~.'

<겨울 나그네>의 제1곡 `안녕(Guten Nacht)'의 구슬픈 곡에 시간을 걸고 지그시 눈 감고 있노라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퍼진다. 페루의 옛 잉카제국 고산도시 신비한 마추픽추는 해발 2,437m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제는 순둥순둥한 알파카와 라마의 눈빛을 통해 그 순박한 종족이 살았음을 유추할 뿐이다. 쓸쓸한 바람만 허무처럼 휘감고 게으른 젖소의 늘어진 젖무덤 같은 시간만이 지루하게 흐르는 곳, 찰나를 살고 간 삶의 흔적들만 여기저기 비문처럼 나부낀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사라질 운명, 먼 먼 우주의 먼지로부터 왔다가 탄소 자락에 섞일 운명들에게 욕망과 성취, 권태와 우울 고리로 순환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빈손과 맨발' 주문은 어려운 화두지만 이제는 하드웨어적 물욕을 벗고 온고지신(溫故知新) 디지로그의 길 위에서 삶의 본질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마추픽추처럼 우리가 이룩한 문명 도시를 절대 고도의 폐허처럼 남겨두고 겨울 나그네처럼 떠나야한다.

`차디찬 돌멩이 한 개씩 가슴에 안고 사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지닌 욕망의 무쇠솥을 내려놓고 스스로 폐허가 될 일들에서 벗어나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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