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장
청국장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4.01.24 17: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현관문을 들어서니 친숙한 향기가 집안 가득 배어있다. 피곤한 온몸을 소박한 미향이 감싸 안는다. 이 향기는 짙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고 구수한 맛이 나를 사로잡는 느낌이다. 무슨 맛이 이토록 마음을 훈훈하게 하지, 후각이 둔한 사람은 모르고 지나칠법한 달착지근하면서도 온화하면서도 끈끈한 정이 흐르는 미세한 맛이 반기다니 뜻밖의 일이다.

한참 만에 기억이 빗장을 열어 나에게 일러준다. 콩을 삶아 청국장 발효기에 넣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고. 그랬다. 남편이 청국장을 좋아해 청국장 제조기를 구매해 놓고 먹고 싶어 하면 언제고 청국장을 만들려고 콩을 삶는다. 아직 집안에 냄새가 배어있음이 너무나 반갑다. 나를 반겨준 이 메주콩의 달달한 맛은 콩이 몇 시간 뜨거운 불에서 담근질 당한 숙성된 농익은 향기다. 가식과 꾸밈이 없는 이 깊은 향기는 바람을 타고 온 꽃향기도 화장수도 아닌 따뜻한 정이 감도는 어머니의 냄새를 닮았다.

예로부터 우리 어머니가 청국장 만드는 과정은 이러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아침 일찍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흰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무쇠솥에 콩을 넣고 장작불을 지피셨다.

흰콩이 붉은색으로 변할 때까지 장인의 솜씨로 불을 조종해 종일 삶는다.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콩 맛의 냄새가 온 집안을 따뜻하게 해 주지 않았던가. 며칠이 지나도 집안 가득 배었었다. 어머니는 푹 고아진 콩을 바구니에 담아 안방 아랫목에 앉힌다. 사흘이 걸린다. 어머니처럼 재래식으로 띄우려면 메주콩이 발효할 때 간균이라는 균이 생기는데 이 균이 증식하면서 단백질을 분해하고 아미노산을 만드는 과정에 암모니아 가스의 강한 냄새가 역겨워 누구나 싫어한다.

내가 사용하는 이 제조기는 24시간만 기다리면 맛 좋은 청국장으로 변신한다. 발효 냄새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다. 실이 풀풀 날리는 잘 뜬 검붉은 장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살짝 뿌리고 절구에 찧어 입에 넣고 맛을 보면 날된장 맛을 혀가 싫어하지 않는다. 요즘은 기계도 보관도 잘 되어 청국장 먹는 철도 없다.

오늘처럼 메주콩 삶은 것도 잊고 있었음에도 어머니가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싶을 때 사용하던 “맛 좀 보고 가”란 단어까지 그리운 향기로 다가오다니. 우리가 음식 맛을 볼 때는 음식을 입에 넣어봐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인 오감의 의미를 아셨기에 맛 좀 보고 가란 단어를 쓰셨겠지. 나는 지금 맛을 후각으로 보고 있다. 이제는 어머니 곁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는지 현재를 자주 잊는데 오늘은 청국장이 옛 향수를 상기시키다니 반갑다.

가마솥 콩 누룽지의 맛은 고소함까지 곁들여 배가 부르도록 많이도 먹었었다. 그리움의 맛은 또 있다. 실에다 꿰어 뒤꼍 처마 끝에 매달아 비들비들 마르면 쫀득한 콩 맛은 푹 삶아진 어제의 콩보다 더 맛이 좋지 않았던가.

어머니의 품속 같은 청국장은 이처럼 좋아하면서도 끓일 때의 냄새는 싫어한다. 나 역시 청국장을 끓인 날은 냄새를 제거하려고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키고, 냄새를 태우기 위해 촛불도 피우고 먹고 나면 양치까지 하지.

어머니는 청국장은 언제고 놋화로를 대청마루에 가져다 놓고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삼발이를 올려놓고 뚝배기에 밖에서 끊이셨다. 지금 생각하니 청국장 냄새를 날려 보내려는 지혜였음을 이제야 알겠다. 청국장은 왜 이토록 강한 냄새를 풍기고서야 청순한 본연의 맛으로 돌아오나. 마법 같은 일이다.

냄새가 싫어 못 먹겠다는 요즘 아이들의 입맛에 다가갈 수 있도록 콩 본연의 냄새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세계인의 입맛도 독점하는 날이 오지 않겠나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