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나무
강한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4.01.2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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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날카로운 바람이다. 몸서리친다. 외투를 겹겹이 걸쳤지만 틈을 비집고 침범하는 바람에 승모근이 오므라든다.

견갑골도 등줄기 쪽으로 오므라든다. 펴지질 않는다. 날갯죽지는 경직되져 간다. 감각이 없어진다.

단지 날이 추워서일까? 모를 일이다. 잘 알던 단어가 생각 나질 않고, 좀 전에 일어났던 일조차 잊힌다. 혼자인데 어수선하다. 그간의 일들이 생생하게 언저리를 맴돈다. 그러다 머리 안까지 치고 들어오고 나가려 하질 않는다. 묵직하게 한자리 차지하고 눌러앉는다. 안간힘을 다해 힘겹게 밀어낸다지만 송곳으로 묵을 밀쳐내는 꼴이다.

며칠 사이 주변에서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 불행과 고통은 한꺼번에 밀려든다지만, 같은 나이의 지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가질 못했다. 가질 않았다. 밥도 먹고 술도 같이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였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죄스런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그럴수록 더 움직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우산도 없이 갈팡질팡한다. 몸을 학대하듯 굴렸다. 오래전부터 앓던 팔의 염증이 심해졌다. 손가락은 경련이 일어 뒤틀리고 손목과 어깨의 통증까지 더해진다. 소스라치게 아프지만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나은 듯하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밤새 내렸나 보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데, 내리는 눈을 보지 못했다. 밤을 새우며 커튼을 걷어 내고서야 눈이 내린 것을 알았다. 겨울 나뭇가지는 앙상하게 말라있다. 눈이 내렸지만 가지 위에는 그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눈꽃이라는데 눈꽃이 피질 않았다.

뻑뻑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지만, 너무 메말라 눈물샘은 더 이상 눈물을 만들어 내질 않는다. 눈을 감고 눈동자를 굴려보지만, 윤활유 없이 굴러가는 바퀴다. 인상을 찌푸려 눈을 애써 감았다. 옷은 걸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선다. 바람이 매섭다. 요 며칠 푹하다 싶었는데 한파라는데 제법 실감이 난다.

집을 나서 회사에 가려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두어 개 건넌다. 횡단보도라지만 대여섯 걸음이면 건넌다.

가는 길은 지름길을 택한다. 좁은 골목길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 버거운 길이다. 1M가 채 안 되는 길이다. 몸은 잔뜩 움츠렸지만, 늘 보던 나무에 눈길을 주는 게 출퇴근하면서 습관화된 일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을 오래 묵은 모과나무가 지키고 있다. 주인이 없어 잘 익은 모과를 따지 않았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갈변된 모과가 달려있다. 지나는 할머니가 지팡이로 딸만한 높이가 되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다. 어떻게 더 화려할 수 있을까 싶던 꽃의 결실이 겨우내 나무에 매달려 썩어가고 있다. 몇 개는 툭 떨어져 묵사발이 되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좁은 골목을 빈번하게 오가는 배달 오토바이에 뭉그러졌다. 그렇게 차이고 뭉개지고 밟히며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그러든 말든 또 꽃을 피울 것이고 열매를 달 것이다.

모과나무를 지나 얼마간 더 가면 목련이다. 피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바닥에 떨구는 참을성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나무다. 가지는 앙상하게 말라가는 듯한데,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그런지, 겨울눈이 더 도톰해졌다. 색도 더 진해진 듯, 비가 와서인가? 더 추워지니 털도 더 다듬은 듯하다. 외투를 싸고 있는 털이 가지런하다. 부지런 떠는 고양이가 털 고르기를 막 끝낸듯하다. 추울수록 그루밍을 더 열심히 하는 나무다. 회갈색이 아닌 회백색이 되어가면서도 더 가지런하게 정갈하게 매무새 한다. 분명 꽃을 피울 것이니 춥다지만 더 애쓰는 것이 보이는 나무다. 추울수록 강해지는 나무, 녹색의 속살은 안으로 들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추울수록 가지는 굵어지고 녹색을 안으로 들여 지켜내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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