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교평리 강줄당기기와 생일선물
옥천 교평리 강줄당기기와 생일선물
  • 김은정 충북문화재연구원 주임연구원
  • 승인 2024.01.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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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문화유산 이야기
김은정 충북문화재연구원 주임연구원
김은정 충북문화재연구원 주임연구원

 

난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민속학 석사 학위를 받고 3개월 만에 첫째를 낳고 2년 만에 또 둘째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 막내가 태어났다. 말 그대로 독박육아를 하며 세 아이를 보듬어야 했으니 내게 바깥 활동은 꿈이나 다름없었다.
막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난 현장으로 갔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아이가 까르륵 소리를 내지르며 놀이터로 뛰어들어가 듯, 나는 어르신들을 만나 뵈러 옥천 교평리 마을회관 문을 대차게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신혼여행지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설??다. 아니 신났다. 드디어 내 놀이터를 찾았다. 그것도 내가 태어난 정월대보름날에!
마을청년회 소속 어르신들이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강줄을 꼬려고 준비를 하셨다. 청년회라고 하기에는 평균 연령이 60세가 훌쩍 넘었다. 십여 명 조금 넘는 어르신들은 네 분이 한 조로 이루며 줄을 꼬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으샤~ ” 구령 맞추는 목소리가 청춘 못지않았다. 볏짚 위에 볏짚을 덧대어 한 바퀴 돌려 꼬는 일은 꽤 힘이 들었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며, 작업 속도를 높이려 술도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줄을 꼬는 내내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부녀회에서는 먹을거리를 연신 내오셨다.
아침에 시작했던 작업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고, 해질 무렵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탑 모양으로 말아 올린 강줄 주위로 풍장소리가 더해졌다. 한 해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마을 축제가 펼쳐질 때이다. 줄을 맨 사람들이 청산향교 앞을 향했다. 홍살문 아래 제사상을 차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이내 강줄당기기를 시작하였다. 예로부터 웃말과 아랫말을 겨뤄 웃말이 이겨야 그해 벼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했다. 보리밥보다는 쌀밥이 맛있기에 강줄당기기의 승부는 보름달도 알고 마을 사람들도 알았다.
한바탕 흥을 돋운 사람들은 그 기세를 몰아 청산교를 향해 걸었다. 예전보다 강줄의 굵기가 얇아졌다고는 하지만 어르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웠다. 어깨에 걸치고, 옆구리에 끼고, 옆 사람과 함께 마주 잡으며 다리 위를 향했다. 그곳에서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향해 다시 한 번 제사상을 차렸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오고,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강바람이 불어왔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발길을 되돌리는 모습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시 강줄을 메고 다리를 건너 강변을 향해 내려갔다. 미리 정비해 놓은 벌판에 강줄이 말아 올려졌다.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다시 한번 제사상이 차려졌다. 이제 불을 놓을 때다. 풍장소리 따라 용의 승천을 바라는 듯 춤사위가 이어지기도 하며, 외지에 나가 있는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두 손을 비비며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붉지만 눈이 부시도록 투명한 불길에 모두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풍요를 가득 머금은 둥근 보름달 아래 모든 부정한 기운이 소멸해갔다. 어르신들은 떡과 술을 나눠 마시며 하루의 노고를 풀었다. 그리고 내게도 복을 주는 떡이라면서 한아름 싸주셨다.
2020년 정월대보름의 추억이다. 당시 교평리의 강줄당기기를 참관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생일 선물을 받았다. 그 뒤로도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이웃의 이야기가 되고, 함께한 이야기가 다시 마을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안타깝지만 그날 현장의 기억은 코로나 19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날 현장의 기억을 잊지 못해 어르신들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운명처럼.
지난 1월 12일 `옥천 청산면 교평리 강줄당기기'의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소식이 들려왔다. 옥천군의 의뢰로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청산면 일원의 민속문화를 조사한 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경력단절 여성에서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고, 세 아이는 강줄을 들고 당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제 한 달 남짓 남은 정월대보름날, 난 생일선물을 받으러 아이들과 함께 교평리로 향하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이 지켜왔던 축제의 놀이터를 이제 아이들에게도 열어주고 싶다. 비록 천방지축의 깍두기가 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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