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겨울
따스한 겨울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4.01.1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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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한 장 남은 달력에도 일정이 빼곡하다. 그 메모들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말하고 있다. 오늘 날짜에는 `쌀 배달'이라고 적혀 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댁을 방문하기 위해 두툼한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선다.

쌀자루를 안고 문을 밀며 들어서는데 훈기가 없다. 난방비를 아끼느라 보일러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은 모양이다. 냉방이나 다름없는 방에서 할머니는 팔에 깁스까지 하고 계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웅크리고 걷다가 빙판에서 넘어지셨다고 한다. 속이 상한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르신을 꼭 안아드렸다. 할머니의 외로움과 푸근함이 가슴으로 전해져 와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다. 독감에 걸리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우니 낮에는 경로당에 가 몸을 따뜻이 하고, 주무실 때는 보일러 온도를 좀 높이라고 말씀드리고 집을 나왔다.

한겨울 날씨지만 바람이 순하다. 볕이 있는 길로 걸으니 할머니 댁보다 오히려 덜 추운 느낌이다. 아직은 큰 추위가 몇 차례 더 올 텐데 할머니는 이 겨울을 어떻게 나실지 걱정이다. 우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행복처럼 온기가 온몸을 감싼다. 뜨거운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앉았는데 할머니 댁의 추운 방이 자꾸만 마음 쓰인다.

뒤로 넘어간 달력을 한 장씩 앞으로 넘기며 지난 일 년을 돌아본다. 작년 이맘때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내 삶에만 열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희망찬 새해 1월이 채 다 가기도 전에 불행이 찾아왔다. 하루하루, 달력에는 바라보기도 두려울 만큼 무서운 일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렇게 남편을 떠나보내고 빈방에서 혼자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말이면 손주를 데리고 집으로 달려오던 자식들도 시간이 지나자 각자 사는 일로 바빠 걸음이 뜸해졌다.

그 무렵이었다. 친구들이 책 한 권을 들고 찾아왔다.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 『달밤 숲속의 올빼미』였다. 그때 내 마음은 몸을 떠난 것처럼 멍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 상태에서 무심한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했다. 남편을 잃은 작가가 잔잔하게 쓴 글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환경만 다를 뿐 어쩜 그리 비슷한지…. 남편이 떠난 뒤 고이케 마리코는 실내복에 헐렁한 허리 고무줄을 고쳐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도 후회스럽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만발한 봄꽃을 함께 보지 못하는 것, 사소한 것에도 잔소리했던 것…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 등등. 그 모두가 후회스러웠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 가는 대목에서 한참씩 눈물을 흘리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해지기도 했다. 또한 친구들과 일정 페이지를 읽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친구들과 목록을 정해 매월 한 권씩 책을 읽으며 조금씩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시린 구석 한두 군데는 안고 산다. 할머니도 나도 따듯한 체온이 필요함에랴. 털장갑, 도톰한 양말, 핫팩, 목도리 등을 챙겨 다시 현관문을 나선다. 비록 별것 아니지만, 가는 마음을 아껴 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타박타박 할머니를 또 찾아간다.

할머니께 닿기 전부터 미리 내 마음이 따스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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