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한 모금
쉼 한 모금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4.01.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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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올레길을 걷는다. 남원포구에서 출발하여 쇠소깎까지 5코스로 13.4㎞다. 그이와 날마다 오르던 산과 숲을 벗어나 오늘은 올레길로 방향을 튼다. 둘이 아닌 막내 오빠네와 함께다. 올케가 올레길에 반해 제주 한 달 살기를 왔다. 육지에서 보다가 여기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

오빠네 가족은 다섯 명이다. 두 딸과 아들 한 명인 부러운 조합이다. 하지만 아픔을 가지고 있다. 올케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들의 껌딱지로 산다. 자신의 시간에 자유롭지 못하다. 여유로울 인생의 오후에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얽매여 있다. 그런 올케를 위한 여행이다. 짐을 지워주어 늘 미안한 오빠의 마음이 담겨있다.

올케는 서울에서 아이들과 산다. 아들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오빠와 별거 중이다. 서로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같이 보내는 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오빠는 한 달 동안 아들을 대신 맡기로 했다. 모처럼 자유를 얻은 올케는 날개를 얻은 새처럼 보인다.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올케가 아이처럼 신나서 저만치 앞선다. 바닷길을 걷다 보면 숲길이 나타난다. 마을이 나오고 차가 다니는 큰길도 지난다. 지루할 틈이 없다. 제주 말로 “놀멍 쉬멍” 걷는 올레길이다. 식당에 들러 배도 채우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한가로움을 즐긴다. 올케는 “좋다” 탄성으로 침이 마른다.

뒤떨어지는 남자들을 제쳐두고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올케는 아들에게 매여 있다가 홀가분하여 좋다고 했다. 제주에 있는 동안은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탁 트인 바다와 푸른 숲이 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견디기 힘들어 돌연 숨이 막혀올 때마다 제주를 꿈꾸어왔던 것 같다.

발달장애인 엄마로 산다는 건 본인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편견 앞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맞서는 일도 분분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원망하는 날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의 삶이 가여울수록 더 고통스러웠을 올케. 가까운 나조차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적이 없다.

이런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예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다졌을 마음이 안쓰럽다. 안에 일고 있는 파도가 쉬지 않고 있음을, 때로는 거세게, 때로는 잔잔하게 찾아오는 파랑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또 잡고 일으켜 세우는 올케가 존경스럽다.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친정 식구들이 펜션을 빌려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올케가 자면서 한숨을 얼마나 내쉬던지 옆에서 밤새 잠을 설쳤다. 없던 근심도 생기겠다고 속으로 흉까지 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그 소리는 해녀의 숨비소리 같은 것임을. 장애가 죄가 되는 망망대해에서 바다위로 떠올라 참던 숨을 내쉬는 것임을. 얼마나 많은 숨비소리로 그 바다를 품었을까.

해녀가 자신의 숨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다가도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물 위로 올라와야 한다. 어쩌다 그 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물 아래로 내려가면 수중에서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호흡의 한계를 넘는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올케에게서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수면 위로 올라와 내뱉는 숨. 숨비소리를 듣는다. 해녀가 자기의 숨값을 아는 것이 중요하듯이 무시무시한 물숨의 한계를 아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나는 안다. 제주에서의 쉼이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숨길을 트게 할 숨 한 모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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