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안경
이상한 안경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12.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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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제작비를 들여 촬영하지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일주일에 400번이나 재방송을 한다고 하니 국내 방송 중 재방송을 가장 많이 하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현대인이 열광하는 고급 저택이나 고급 승용차 고급 요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수수한 프로그램이 이토록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불필요한 욕망이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요치 않은데도 거품처럼 부풀려져서 우리네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공허한 욕망이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욕망의 나무는 오르면 오를수록 키가 자란다. 기를 쓰고 올라도 꼭대기는 계속 멀어지고, 그렇다고 내려올 용기마저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키우고 있는 욕망의 나무에 매달려 불안한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있는 거라고는 자연뿐인 산 속에서도 충분히 자족하며 살아가는 자연인의 모습이 화면을 채울 때 사람들은 잠시나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는 일을 멈추고 편한 숨을 쉬었을 것이다.

연말 모임을 새로 생긴 뷔페에서 하자는 동서의 말에 새로 생긴 줄도 몰랐던 뷔페를 동서 덕에 가보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뷔페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몇 백가지는 될 것 같은 호화로운 음식 사이를 누비며 식탐 많은 나는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음식을 내 위장이 다 소화해낼리는 만무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수북이 올려 담은 접시 두 개를 비우고 나자 느끼함이 올라오며 얼큰한 국물로 입가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음식이 있었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딱 두 접시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유혹 또한 내가 먹은 두 접시의 음식을 뺀 나머지 음식과 같은 것이리라.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 아니 전혀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붙들려 가볍게 살지 못하고 무거운 발짝을 떼며 살아왔을 것이다.

금욕적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는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억제하고 금할 수 있어야만 고통 없는 쾌락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필수적인 욕구를 뺀 나머지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진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쟁취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없는 것을 욕심만 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어려우니 어찌하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의 소가 더 튼실해 보이고, 심지어는 남의 자식, 남의 배우자가 더 훌륭해 보이는 이상한 안경이 우리에게 씌어져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얼마 전 어느 스포츠 스타가 연루된 희대의 사기극이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외국의 재벌 3세 라는 말에 속아 갖가지 사기극에 휘말린 그녀의 분별없음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제법 있었다. 죄 없는 사람만이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런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 사는 세상은 돈 있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처럼 보인다. 스타들의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이 긴 시간 TV화면을 장악하고, 대기업 본부장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는 찾아보기도 힘든 수준이다. 그렇지 않아도 남의 것이 더 커 보이는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는 우리들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는 힘든 세상이다.

나만큼이나 가진 것 없어도, 아니 어찌 보면 나보다 더 가진 것 없어보여도 충만하게 살아가는 자연인의 삶이 느슨한 안도감을 주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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