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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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찬인 전 충북청소년문화진흥원장
  • 승인 2023.12.1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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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신찬인 전 충북청소년문화진흥원장
신찬인 전 충북청소년문화진흥원장

 

“여보, 우리 주말에 여행가요.” 아내가 느닷없이 여행을 가자고 한다. 웬일인가 했더니, 딸아이가 담양 한옥마을에 예약해 놓았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단다. 일정을 살펴보니 일요일에 점심 약속이 있다. 가고 오고 운전하는 시간을 제하면, 결국 토요일 오후밖에는 관광할 수 없다. 가성비가 떨어진다며 난감해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방값이 아까우니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한다. 여기 바람이나 거기 바람이나 그게 그거 같은데 굳이 가자고 한다.

담양 국수 거리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국수라면 우리 동네도 많지 않은가. 콩국수, 누른 국수, 해물칼국수, 잔치국수 등 수없이 많은데 담양까지 가서 국수를 먹자고 한다. 담양 국수 거리에 도착하니 간판마다 초계국수집이다. 죽순 초계국수와 댓잎 계란을 먹으면서 주인에게 물었다. “이곳은 온통 초계국수만 하나 봐요.” 그러자 주인은 “재료는 닭고기와 죽순이지만, 맛을 내는 비법은 조금씩 다릅니다. 기회가 되면 다른 집 국수도 한번 맛보세요” 별수 있으랴 생각하며 `관방제림' 산책을 나섰다.

제방에는 몇백 년 묵은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고풍미를 풍기고, 하상도로에는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즐비하다. 예스러움과 멋스러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맑고 푸른 쪽빛 하늘을 가득 담은 관방천에는 초겨울의 따스한 햇살을 품은 정겨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인근에 있는 메타프로방스마을로 갔다. 하얀 벽면에 황색 지붕의 유럽풍 건물로 조성된 동네다. 남유럽의 프로방스지방에 온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작지만 예쁜 동네다. 하얀색과 주황색, 파란 하늘이 왠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숙소로 향할 시간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 조선 시대 3대 정원이라 일컫는 소쇄원을 방문했다. 아담한 계곡을 끼고 몇 채의 한옥 건물이 있다. 건물 주변에는 대나무숲이 있고, 원림 뒷산에는 소나무숲이 병풍처럼 드리운 아름다운 정원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대나무숲을 등지고 `제월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정원을 만든 조선 중기의 양산보라는 선비가 살던 집이다. 현판에 새긴 뜻은 `비가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고 한다. 그저 매일 뜨는 똑같은 달이 아니라, 비가 갠 맑은 하늘에 뜨는 상쾌한 달을 바라보는 곳이란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니 금방이라도 앞산에서 둥근 달을 토해 낼 듯한 느낌이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니 `광풍각'이라는 누각이 있다. 이곳은 `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란다. 비가 온 뒤에 화사하게 비치는 햇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 생각해서인지 맑은 햇살을 품은 청량한 바람이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을 지나 광풍각 뜰에 내려앉는다.

이곳의 주인 양산보는 반복되는 일상과 익숙한 풍경 속에서 늘 새로운 느낌을 받고자 했었나 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해가 뜨고 지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매일 마주치는 돌과 꽃과 나무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듯싶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같은 듯싶지만 조금은 다른, 자신이 사는 정원을 매 순간 낯설고 새롭게 느끼며 살았던 듯싶다.

숙소인 한옥의 정원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빼곡하다. 창문 너머 대나무 끝에 수줍은 듯 틀어 앉은 반달이 살포시 걸려있다. 깊어 가는 밤, 오늘따라 “스르락 스르락” 댓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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