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의 수고로움
조금의 수고로움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12.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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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몇 주 전 주말, 현관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쓰레기봉투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며 중얼거리는 남편의 손에는 노란 쓰레기봉투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아마 올해를 통틀어 처음 쓰레기봉투를 사봤을 남편은 쓰레기봉투 한 장에 600원이나 한다며 반복해서 놀라워했다. 이처럼 1년에 딱 한 번 쓰레기봉투를 샀어도 충분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 가족이 올 한해 누구보다 열심히 우유갑과 다 쓴 건전지를 모았기 때문이다.

약 3년 전 첫째 아이가 다녔던 유치원에서는 원아들이 환경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할 때마다 수첩에 도장을 찍어주곤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도장을 가장 많은 아이를 선별해 쓰레기봉투를 선물로 주곤 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환경이라기보단 친구들 앞에서 쓰레기봉투를 받을 때마다 뿌듯해하는 아이의 모습 때문에 정말 열심히 우유갑을 씻고 말리고 찢어서 차곡차곡 모았다. 그렇게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들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우유갑 모으기 전용 백이 꽉 차면 아이와 함께 주민센터로 교환하러 갔고, 쓰레기봉투를 받을 때면 환경도 지키고, 소액이지만 우리 집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우유갑을 교환하러 갔는데 주민센터에서 이제 더 이상 종량제 봉투를 주지 않고 우유 팩 1kg당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들고 실망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서 있는 아이 옆에서 나 역시 한숨이 절로 났다. 물론 아이와 내가 실망한 이유는 확연히 달랐다. 유치원에서 쓰레기봉투를 받던 기억이 좋았던 아이는 그 추억이 부서져 속이 상했고, 나는 기후 위기가, 탄소 중립이 어쩌고저쩌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하는 이 나라가 작게나마 환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국민의 의욕을 이렇게 꺾는가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 이후로 쓰레기봉투고 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매번 우유 팩을 씻고 말리고 찢어서 차곡차곡 모으고, 페트병의 라벨지 떼느라 씨름하고, 병뚜껑과 다 쓴 건전지도 따로 모으는 등등 나의 노력이 환경을 지키는 데 진짜 먼지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 때마다 혼란스러웠는데 마치 다 쓸모없다고 확인받은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 최근에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오랜만에 감기 걱정 없이 바깥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어 기뻐하는 아이들 모습과는 별개로 나는 말로만 듣던 기후 위기가 이렇게 나타나는 건가 하는 생각에 흠칫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 다시 말려두었던 우유갑을 곱게 찢어 펼쳤다.

당연히 수고롭다. 예를 들어 음료수를 마시고 그냥 버리면 되는 걸 라벨지를 벗기고 병뚜껑을 분리하고 남은 병은 발로 꾹꾹 밟아서 분리 배출하는 과정을 과연 누가 일부러 하고 싶을까. 그럼에도 해야 할 지경에 이른 지금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다수가 실천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입으로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얘기하지만, 쓰레기통이 없는 놀이터 정자에 아무렇지 않게 음료수 병과 과자 봉지를 잔뜩 내버리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할까.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모두 이론이 아니라 진짜 환경을 위해 조금의 수고로움을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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