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가는 길
절로 가는 길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12.1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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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제주에도 석굴암이 있다. 경주에 있는 암자로 선명하게 각인된 터라 듣는 순간 신기했다. 지인이 추천해 줘서 알게 된 곳이다. 사교성이 많은 그이 덕분에 사귄 분으로 우리 부부에게 친절하다. 제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이 꽤 생겼다. 나의 재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 나이에도 관계를 맺는다는 게 여전히 힘들고 서툴다.

한라산 북사면(北斜面)에 있는 크고 작은 골짜기를 아흔아홉 골이라 부른다. 그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계곡에 자리한 영험한 기도 도량이다. 입구에는 인욕(忍辱)의 길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제주의 불교 성지 순례길은 6코스가 있다.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육바라밀로 붙여진 이름이다. 보시의 길, 지계의 길, 인욕의 길, 정진의 길, 선정의 길, 지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인욕의 길은 관음사에서 존자암까지의 21km의 거리로 거치는 사찰 수가 일곱 개나 된다. 거기에 석굴암도 속한다. 이 수행은 온갖 모욕과 번뇌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원한과 노여움을 없앰으로써 도달하는 고요한 마음 상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 성나고 언짢은 마음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길 한쪽에는 물품 보관대가 있다. 그 뒤에 “석굴암에 올라가는 물품입니다. 함께 도와주시면 법당에 큰 도움 되겠습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다. 앞에 올라가는 사람이 봇짐을 짊어지고 올라간다. 나도 들어보니 짐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림짐작으로 6㎏은 될듯하고 벌려진 바랑에는 20ℓ 물 한 개와 부탄가스가 보인다. 그이와 하나씩 둘러메고 출발한다.

들머리를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이다. 낙엽 양탄자가 깔려 발밑이 푹신푹신한 느낌이 좋다. 나무가 울창한 길은 기암괴석과 바위가 멋진 풍경을 더한다. 이끼가 나무를 둘러싸기도 하고 바위를 온통 감싸고 있는 모습은 신비롭다. 숨이 차올라갈 무렵 데크 계단이 나타난다. 오르고 또 오르고 계속 이어진다.

삼십 분쯤 올라갔을까. 스피커를 통해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계곡 아래에서 들리는 듯한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절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을 보면 다 온 듯하다. 어깨가 묵직하여 아파서 얼른 짐을 벗고 싶다.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디어 펼쳐진 내리막이 반갑다. 아찔한 계단을 한참 내려와서 마침내 석굴암을 만난다.

제주 4·3 피해 사찰로 허술한 조립식 건물이 초라하다. 절은 바위에 의지하고 있다. 경주의 석굴암은 뜨는 햇살이 부처 이마를 비춘다. 반면 제주의 석굴암은 지는 햇살이 절 중앙을 비추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천연동굴 안에 있는 법당 바로 옆이 물품을 놓아두는 곳인가 보다. 몇 개의 봇짐이 놓여있다. 우리도 거기에 짐을 내려놓는다.

부처님을 뵙고 내려가는 길은 내리막의 연속이다. 맨몸은 가뿟해져 가벼운데 왠지 뒤척이는 마음으로 무겁다.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일까. 인욕의 길 위에서 내게 묻는다. “관계의 상처로부터 나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 대답보다 먼저 분한 마음이 불거져 나온다.

인욕은 인내하고 용서하는 힘이다. 자신을 비워내야만 스스로 편안해질 수 있는 법이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원한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하면 그 순간 지옥은 연꽃 핀 극락이 된다.” 석굴암에서 들려오는 법구경이 금봉곡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그 소리가 장군죽비가 되어 나를 내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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