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승인 2023.12.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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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사실, 올해 나는 누군가의 엽서가 되고 싶었다. 오래된 고궁의 돌담 그림자에 숨어 그곳의 배경이 되고 싶었고 동네서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책을 고르고 싶었고 혼자 카페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찻집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깊어 묻고 낄낄거리며 휴대폰 숏츠를 보고 싶었고 대구 친구네 간다는 핑계로 정호승 문학관을 둘러보며 김광석을 추억하고 싶었다. 이렇게 무용한 날 속에 나를 방치하고 싶었으나 무엇하나 해보지 못했다. `이제라도 해보면 되지'라고 하겠지만 한번 떨어져 버린 텐션은 경계성 당뇨 환자가 오후의 나른함을 극복하고자 입에 넣는 초콜릿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하고 현란한 애씀이 필요했다.

결국, 11개월 동안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끌어안고 한해의 뜨거운 공기와 급조한 낭만과 게릴라성 갱년기 증상으로 외롭고 높고 쓸쓸하기만 했다.

올해 독서 강사로 참여할 때 그림책을 고른 팀이 있었다. 매우 반갑고 설ㅤㄹㅔㅆ다. 특히 마지막 모임의 그림책은 글밥이 없는 그야말로 정말 서정적인 그림으로 가득한 그림책이다. 주인공은 사슴 한 마리가 전부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푸르고 깊은 색감은 신비함과 고독함, 혹은 어떤 희망을 말하는 듯이 느껴졌다. 센주 히로시가 쓰고 그린 작품 <별이 내리는 밤에>다.

별똥별이 내리는 밤을 목격한 발목 휘청이는 아름다운 어린 사슴은 부모를 떠나 여행을 감행한다. 나도 모르게 사슴의 발목을 덩달아 따라가며(마치 내가 떠나는 것처럼) 그의 금의환향을 바란다. 깊고 푸른 곳만 있을 줄 알았던 생은 혼잡한 도시의 불빛과 불안한 인공의 길목, 가파른 계단의 곤란함과 화려함 속에 위축되는 별빛을 보고서야 지친 발목을 옮기는 사슴을 보며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나 따위가 위로가 되겠냐 마는 가만히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생은 저리도 매일 쓸쓸하고 가끔 즐겁고 하루쯤 살아서 좋다는 감상으로 일기라도 끄적이는 것이다.

방탕한 사춘기 같은 어린 사슴의 여행은(일탈이나 가출?) 푸른색이 더욱 짙어지고 많아지며 절정에 이른다. 건조하고 인공적인 불빛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밤하늘의 별은 도시를 떠나 숲으로 오자 그제서야 보인다. 작고 소중한 것은 기실 어둡고 탁하고 흐리며 먹먹할 때 더욱 선명한 법이었다. 숲의 작은 길을 돌아 도시의 불빛 속에 자신을 내주기도 했던 어린 사슴이 다시 여린 발목으로 찾아간 곳은 자기가 떠나왔던 숲이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흔한 명언을 경험한 자의 고요함과 평화가 그림 속에 묻어 있었다.

새벽녘 무심히 일어나 앉아 그림을 읽는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님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은 한 번도 당연했던 적이 없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여리고 어린 사슴이 되어 떠나기엔 빨라진 계산 머리가 뒤통수를 당길 테고 일용할 양식처럼 펼쳐진 해야 할 일 속에 결국 다시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떠나야겠다는 열망이 영혼을 덥히고 있다.

엊그제 언니에게서 간단한 문자가 왔다. 주소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어디든 가서 엽서를 보내고 싶다나. 한 발 늦었다는 의문의 일 패 감을 감추고 기꺼이 주소를 또박또박 적으며 그녀에게서 엽서 받을 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이 새벽에 대구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라고 쓰고 너에게 도착하기를 기도해 달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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