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復棋)
복기(復棋)
  •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 승인 2023.12.0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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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찢겨나간 열한장의 달력만큼이나 내 생의 시간도 찢겨져나갔다. 한해를 되짚어보니 올해 역시 여느 해와 다름없이 신년계획과 함께 시작됐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나 어떤 것이든 세워야 할 것 같은 그 즈음의 계획은 언제나 창대한 시작과 미약한 끝이라는 뚜렷한 전개로 구성된다. 놀랍지도 않게 그 다짐들은 2월을 맞이하지 못했다. 또 결연한 의지를 담았던 수많은 작심(作心)은 숱한 핑계와 온갖 변명에게 난도질당하며 삼일을 넘기지 못했다.

복기(復棋).

사전적 정의는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봄이다. 이미 끝난 바둑의 승부를 첫 수부터 그대로 바둑판에 재현하는 것으로 바둑뿐만 아니라 판을 처음부터 돌이켜 본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착수의 순서와 함께 자신의 수와 상대의 수를 모두 외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프로기사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바둑기사들은 본인의 대국 복기는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의 명승부 복기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은 한 수 한 수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정성과 의미를 담은 착수(着手)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둑기사들의 복기는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이로움이다.

2016년 구글 딥마인드 체인지라는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바둑 대국으로 여러 국제기전에서 우승했던 세계 최상위급 프로 기사인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결이었다. 알파고(AlphaGo)는 구글의 지주회사 이름인 알파벳이자 최고를 의미하는 알파(α)와 한자 바둑 기(碁)의 일본어 발음 고(ご)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 Go와 합성된 이름으로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은 이 대결에서 바둑은 가능한 국면의 수가 일전에 인공지능과 대결을 펼쳤던 체스와 같은 다른 종목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세돌 9단은 처음 두 번의 대국 내내 주도권을 잡지 못하며 흔들렸고 알파고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번의 패배 후 세 번째 대국도 연속된 패배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한다. 멘탈 강하기로 유명한 그도 인공지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분명 감정의 개입도 패배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

연속된 세 번의 패배에도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인정은 솔직하고 당당했고 준비는 담담했다. 허탈함과 심리적 중압감이 심했을 연이는 세 번의 패배 직후에도 그는 복기(復棋)했다. 그리고 제4국. 이세돌 9단은 희대의 승부수라고 회자되는 78수로 기보에도 존재하지 않는 묘수(妙手)를 둔다. 알파고는 당황한다. 복기가 만들어낸 신의 한 수였다. 결과는 백 180수 불계승. 드디어 알파고가 이세돌 앞에 돌을 던졌다.

“어떻게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졌는지가 중요하죠. 저는 그걸 몰라서 답답합니다.” 그가 외롭게 싸우고 있던 상대는 알파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올해를 복기해보면 어떤 날들은 습관을 만들어 주었고 어떤 날들은 내일을 위한 준비였다. 때로는 분노였고 때로는 아쉬움이었고 때로는 슬픔이었고 때때로 기쁨이었다. 경솔한 악수(惡手)와 돌이 킬 수도 없는 자충수(自充手)도 두었고 착수(着手)조차 못한 머뭇거림의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견뎌냈다. 그러나 바둑판 위 어느 하나 의미 없는 돌이 없듯 의미 없는 하루란 없다. 그리고 채움과 비움 사이에는 언제나 배움이 있다. 그래서 바둑은 인생을 닮았고 그것이 우리가 복기해야하는 이유다.

채우는 중인지 비우는 중인지는 결코 중요치 않다. 어쨌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배우는 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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