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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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3.12.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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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찬 바람이 싫지 않은 계절, 몇 잎 남지 않은 단풍이 12월 남은 숫자만큼 나무에서 간당거린다. 지나간 햇빛과 바람의 시간이 길 위에서 바스락거린다. 내려놓아야 편해지는 나무와 단풍 사이, 우리는 지금 나무의 마음일까? 단풍의 마음일까? 저 멀리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을 바람의 노래가 늦은 저녁 새벽을 두드린다. 마치 한 장 남은 달력과 한해가 시작하는 달력처럼.

책상 위에 2023년 12월과 2024년 1월, 탁상용 달력을 넋 놓고 쳐다본다. 이리보고 저리 보며 생각에 잠긴다. 12월 달력에 동동거리는 발걸음과 지쳐있는 심신이 강물 위 그림자를 지우며 흐른다. 백지로 놓인 1월 달력에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할 수 있을까? 작은 나에서 출발할까? 우주에서 시작할까? 점층과 점강, 상승과 하강 사이에 “나”라는 주체를 어디에 놓고 시작하면 좋을까?

12월은 화장품 회사에서 준 달력이라 봉황이 화장품 뚜껑 위에 기품 있게 앉아 있다. 1월은 은행에서 준 달력으로 집 그림과 캐릭터들이 저축 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제각기 저만의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의 일부다. 경쟁 시대 내가 움직여야 세상이 보인다. 자기 피알은 필수라 했던가. 피알은 자신의 내면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기이지 상품처럼 포장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피알은 내면보다는 외향적으로 드러내기에 가까워서 속기 쉽다. 참이란 면밀히 숨겨진 내면의 빛이다. 그럼 나는 “나”를 얼마나 피알하고 있는가?

공자는 사리사욕으로 길들어진 업식(業識)의 나를 이기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나, 자신도 이기지 못해 중심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무엇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세상과 등지고 수양만 한다면 가능할 일이지만, 생각과 말과 행동을 멈추고 그쳐야 할 지지(知止)의 지혜가 필요하다. 실력도 능력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지지(知止)가 부족해 무리보다는 일대일 만남을 좋아하는 자신을 본다.

코로나로 발목 잡혔던 행사나 모임이 풀리면서 본인의 활동 분야에 따라 분주한 정도가 다르다. 나 또한 글쟁이다 보니 문학단체 모임과 출판, 수상 소식이 하루에도 몇 건씩 전달된다. 모두가 축하할 일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일도 간혹 있다. 특히 수상 부분에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상이라면 밥상이라도 열심히 받으라는 말이 있지만, 받고도 유쾌하지 않은 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최측과 당사자만이 느낄 것이다. 직장과 단체 활동하는 데 있어서 어디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비리로 흐려진 현 사회를 보고 있으면 어디가 바닥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하늘같이 믿고 따랐던 법조계의 판단도 정치인들의 발언도 신뢰할 수 없는 현시대에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시대든 부조리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그 경계에는 어디까지나 “양심”과 “정도껏”이라는 도덕적 책임과 윤리가 존재한다. 법이란 잣대로 먹고 사는 법조인이나 국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의 마당극을 보면 어느 드라마나 탐정 소설보다도 스릴이 넘친다.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다운 초특급 배우들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명한 국민이라면 시끄럽지 않고 공적으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년과 2024년 사이에 놓인 12월, 책임과 의무는 뒷전이고 권리와 주권만 주장하는 시대, 헐벗은 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에 난 고요의 길을 찾아본다. 세월 탓인가? 예전에 뾰족하게 보던 시선이 조금 둥글어졌다. 이건 이래서 아니고, 저건 저래서 아니었던 것이 그럴 수 있지 뭐로 바뀌면서 `나, 바보 아니야?'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바보가 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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