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 짜는 시간
베 짜는 시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12.0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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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네 계절을 참으로 열심히 살아 냈구나. 크거나 작은 짐승부터,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거나 불편하게 했던 벌레까지 모두가 참으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어디 그뿐이랴. 뿌리를 땅속 깊게 내리고 묵언 수행을 하는 나무들과 깊지는 않으나 수많은 뿌리를 내린 작은 풀들도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애쓴 그 수고로움은 위대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자연만큼 한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똑 부러지게 수행하는 것은 없지 싶다.

식물들이 겨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겨울만큼 부지런한 때는 없다. 겨울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나무들의 수명도, 꽃과 열매의 양과 질은 달라진다. 그러니 나무들은 겨울에도 부지런히 안으로 수액을 나르고 몸을 키우는 것일 게다. 나무들의 그러한 노력은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옹골진 씨앗을 만든 것으로 증명이 된다. 동물들도 따뜻한 봄이 오면 가족을 만들거나 먹이 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동물들의 습성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추운 겨울이 오기 전까지 거반 바쁘게 움직인다. 겨울이 되면 잠을 자거나, 그렇지 않으면 겨울을 나기 위해 튼튼한 털로 중무장을 한다.

계절의 경계도 한해의 마무리도 없는 것은 우리 사람뿐이다. 계절마다 옷을 다르게 입거나 먹는 음식이 다르니 우리도 자연 속 생명들과 뭐가 다를까 싶겠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네 계절 중에 특별히 몸이 달라지거나, 후손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때는 없지 않던가. 겨울에도 집 안에서는 여름옷을 입고, 여름에도 얼음을 만들어 먹는다. 여름에도 겨울을 만나고, 겨울에도 여름이 늘 곁에 머문다. 그러니 봄의 설렘도, 여름의 환희도, 소중한 결실의 가을도, 겨울의 신성함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않고 제 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우리 사람이다. 그러니 세상의 재앙을 입에 올리고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식탁에 앉아 창밖을 구경중이다. 얼마 전에는 눈이 내렸고 매일 같이 된서리가 내리니 나무도 땅도 꽁꽁 얼은 듯 조용하다. 바람도 불지 않아 고요하기만 하다. 그런데 창으로 무언가 실 같은 것이 춤을 춘다. 다가가 보니 거미줄이다. 얼마 전 높은 천정까지 먼지를 털어내고 대청소를 했건만 어디에서 숨어 있다 밤새 이리도 긴 줄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우리 집 거실 천장은 가운데가 쑥 들어간 맞배 구조다. 천정이 꽤나 높아 거실이 훤하고 밝다. 청소를 하려면 장대 먼지 털이가 필요하다. 구석구석 다 없앤다고 했는데 어디엔가 숨어 있었나보다.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려 집안에 줄을 치기 시작한 것일까. 어디든 공간만 있으면 줄을 치는 거미의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난다. 여름날, 애써 만든 집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 찢어지면 어느새 화려하게 다시 자신의 집을 짓는 거미도 겨울이면 어디선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며 봄을 기다린다. 그런데 우리 집 거실 천장에 거미줄을 쳐 놓은 거미는 여전히 아마도 계속 실을 만들고 집을 지을 것이다. 겨울도 모르고, 그렇게 다시 봄을 맞으리라. 베짜기 명수였다던 아르크네가 거미로 변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자연이 겨울, 봄, 여름, 가을 동안 열심히 실을 뽑고 결실을 보듯 사람도 계절도 잊은 채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자연도 사람도 자신의 생을 위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베짜기를 하는 것이리라. 모두가 잠든 밤,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오롯하다. 또각 또깍, 탁 탁 탁, 지금은 거실의 아르크네가 베 짜기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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