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블록집
무너진 블록집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12.0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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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서둘러 찾아온 한파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나들이 갈 엄두가 안 났던 주말, 집 근처에 있는 키즈카페로 향했다. 취향이 확실한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흩어져 놀았고, 덕분에 나와 남편도 한 명씩 전담해서 뒤 따라다니기 바빴다. 이제는 좀 한 공간에서 놀았으면 하는 소망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쯤 두 녀석이 한꺼번에 어디로 뛰어들어갔다. 서둘러 따라가니 그곳은 블록을 가지고 노는 블록 방이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늘 느끼지만, 놀이의 흐름에 맥락은 없어도 추진력 하나만큼은 정말 기가 막힌다. 첫째가 블록으로 자신들이 들어갈 만한 집을 만들자고 제안하자 둘째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집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블록이 거의 성인 남자 얼굴만 했기에 금방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한참을 끼우고 올려도 첫째 아이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높이까지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 그래도 언제나 끝은 있는 법. 겨우겨우 다 만들고 역할놀이를 몇 번이나 했을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던 둘째가 블록집을 온몸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만들었던 집은 아이의 작은 몸이 몇 번 부딪히자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다. 자신이 한순간 집이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듯이 조금은 허무하고 조금은 허탈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블록을 보며 불현듯 한 여성이 떠올랐다. 며칠 전 뇌사상태에서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그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배우라는 꿈을 키워왔다는 20대의 그녀. 바로 일명 `롤스로이스 사건'의 피해자다. 롤스로이스 차량 운전자가 갑자기 인도로 돌진해 걷고 있던 한 여성을 덮쳤다는 뉴스를 처음 봤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떠도는 “운전자가 차 밑에 깔린 여성을 방치한 채 도망갔다”는 둥, “운전 당시 마약에 취해있었다”는 둥, 하나같이 충격적인 구설수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더이상 이 사건에 관심 갖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한 매체를 통해 유족의 인터뷰를 듣게 되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서려 있는 그 깊은 슬픔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저 평범한 하루였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었고, 항상 되돌아오던 시간이었다. 유족들은 “왜?”라는 질문을 붙잡고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이 무너졌다. 그것도 너무 쉽게 아주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제는 굳이 살인이나 성폭행과 같은 강력범죄를 일으킨 범죄자가 활개를 치고 다니지 않아도 내 옆에 사람이 혹시 나를 차로 들이받지 않을까, 돌려차기와 같은 고강도의 폭행을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모르는 사람이 말만 걸어도 흠칫 뒤로 물러서며 경계를 해야 하는 삶이 시작되고야 만 것이다. 이런 행태를 보며 누군가는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만, 각자도생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는 잠깐 집의 형태였다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진 블록들처럼 우리가 세우고 지켜온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검은 머리 짐승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며, 저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해답이 될지 의문이 든다. 나는 그저 최소한 피해자가,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단죄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희망한다.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관용이 피해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권리를 파괴하는 선례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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