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날
하루 전날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3.11.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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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꾸물거리던 하늘이 우중충한 게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다. 내일은 두 달 전에 장만한 우리 집으로 이사 가는 날인데 추워질까 걱정이다. 남 이야기만 같던 이사, 마지막으로 커튼을 떼자 휑하니 드러난 창문이 낮이 설다. 그제야 이 집의 마지막 밤이란 게 실감 난다.

결혼하고 2년쯤 지났을 무렵 집을 샀다는 남편의 느닷없이 말에 무척 황당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무런 의논 없이 집을 샀다는 남편,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샀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집이라는 큰 문제를 혼자 결정하는 남편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첫 집이 생겼다.

전세로 살던 집이 만료되어 새로 산 집에 이사했다. 남이 살던 집에 수리는커녕 도배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시간도 돈도 부족해 집수리하기 어렵다는 남편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투정도 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더한 곳에서도 살았다는 남편에게 집은 그저 잠만 자는 공간일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처럼 첫 번째 집이 사라지는 것도 순간이었다. 남편이 하던 주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빚을 갚으려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 음성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은 어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에 몇 날을 울며 살았지만 울어서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걸 알았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다 방 세 개 있는 임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비록 임대로 사는 집이지만 원하는 만큼 살 수 있고 아이들에게 각자의 방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다행히 하는 일도 잘되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임대 아파트를 벗어날 것도 같았다.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사월의 봄 산책길은 벚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함께 길을 걷던 남편이 주저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빚이 생겼다며 할 말이 없다는 남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희망이란 빛이 사라지고 세상은 더 이상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 남편의 사주를 보았는데 착실하게 생활해야 집 한 칸 마련하고 살 사주라고 했다. 이제 남편은 두 번째 집을 마련했으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30년 결혼 생활에 처음 15년은 여덟 번이나 이사했고 나머지 절반은 이사 없이 한집에서 줄곧 살았다. 남편의 잘못된 선택에 고생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커 주었으니 그만하면 잘 살았지 싶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이사는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숨 돌리기도 잠시, 당장 필요한 물건부터 찾기 시작했다. 포장 이사라지만 짐이 섞이고 섞여 보물찾기가 따로 없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고 큰아이는 영국으로 출국했다.

삶은 오르락내리락 예측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와 같다더니 올 한해 우리 가족에게도 생각지 못한 일이 많았다. 큰아이는 해외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고 작은 아이도 첫 발령지로 떠났다. 환갑을 맞은 남편은 정년 없이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전 직장의 제의를 받았다. 나도 비록 암 진단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선물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중 남편의 변화가 가장 큰 선물이다. 가족의 말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멈추었던 가족 카톡 방에 대화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우리 가족에게 하루 전날 이사 하루 전, 실로 하나하나 엮어 완성하는 뜨개질처럼 우리는 새로운 꿈을 엮으려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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