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사는 법
나무가 사는 법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11.3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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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안다. 아름답고 신비한 제주의 숲에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을.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 앞에 숙연해짐을. 숲에 가면 초록의 기운이 온몸에 배어온다. 잔잔하게 스며드는 여유는 내 안의 조급함을 밀어낸다. 억세게 부대낀 하루가 차분해지고 마음의 소요도 가라앉는다. 오직 한길로 기도는 흐른다.

11월의 바람이 차다. 춥다고 산에 가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이가 아파 건강을 이유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지금은 즐기면서 하고 있다. 오늘도 숨이 차도록 힘든 순간을 멋진 풍경이 보상한다. 그래서 새로운 산을 갈 때면 기대를 하게 된다.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루라도 거르면 서운하다. 그토록 숲이 좋다. 산을 오르는 힘듦보다는 내가 얻고 오는 위로가 더 크다. 바위와 나무가 서로 어우르며 살아가는 숲. 척박한 환경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나무. 뿌리가 문어발이 되어 다 드러나 있는 모습은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인고였는지 말해준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무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들은 자신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과 함께 살아간다. 가지와 가지가 뒤틀리고 구부러진 원시의 모습에서 긴 세월을 견딘 생명력을 엿본다. 나무라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초연한 듯 보인다. 모든 고통을 다 이겨낸 도통한 얼굴이다. 나무가 품은 시간 앞에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한다. 숲에서 만난 성자다.

유독 제주에는 덩굴식물들이 많다. 소나무를 휘감아 타는 담쟁이덩굴은 흔하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왕성한 세를 과시하는 덩굴이 눈에 거슬린다. 나무의 영양분을 빼앗아 사는 기생식물이 얄밉다. 기어코 살아남지 못해 고사한 나무도 보인다. 밑동아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는다.

기생식물 중 담쟁이덩굴은 지지대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한다. 소나무를 기생으로 삼은 덩굴만이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나무의 피톤치드와 송진을 영양분으로 먹고 자라 굵어지면 송담이라는 귀한 몸이 된다. 소나무로서는 귀찮은 존재겠지만 사람들은 약재로 환대한다. 겨울이면 송담을 채취하려 산을 헤집고 다니는 약초꾼들을 종종 만난다.

초겨울, 분명 잎을 다 떨굴 시기건만 산딸나무가 초록빛이다. 덩굴성 줄기가 타고 올라가 나무와 한 몸이 되어 있다. 잎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뾰조롬히 내민 붉은 열매가 꽃처럼 예쁘다. 칙칙한 나무에 초록의 옷을 입히고 빨간 구슬을 단 나무의 정체를 가만히 살핀다. 마치 제 몸인 양 제대로 터를 잡았다. 기세도 당당히 주인행세다. 이 염치없는 녀석은 줄사철나무다.

사계절 푸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 줄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생긴 것이다. 줄은 줄기에 뿌리를 내려 덩굴처럼 자란다는 말이다. 앙상한 가지에 화려한 변신이다.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띄지 않다가 산딸나무가 죽은 듯이 보일 때 서야 주인공으로 나선다.

줄사철나무가 산딸나무를 기생으로 삼은 건 탁월한 선택이다. 앙상한 나무가 보내는 묵언의 겨울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사철 푸른 나무를 택했다면 그처럼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지금, 칙칙한 나무가 새틋하다. 나목으로서의 설움을 알기에 산딸나무도 제 몸을 기꺼이 내주었으리라. 분명 둘은 기생이 아닌 공생의 관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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