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파는 사람
샘 파는 사람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11.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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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심경이 복잡하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3천6백5십일. 시간으로 따져 보면 무려 8만7천6백 시간이다. 숫자 쪽으로는 영 감각이 둔하다 보니 그게 얼마만큼일지 실감은 안 나지만, 꽤 긴 시간임에는 틀림없을 듯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필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참 빠르다. 그렇게나 많은 날을 속절없이 흘려보냈나 싶어 아쉽기도 하고 너무 느린 건 아닌지 조바심 나기도 한다. 서당 개 십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던데, 풍월은커녕 겨우 신변잡기 면한 글 수준이니 지금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다. 다만, 그래도 한눈팔지 않고 한 길로 걸어왔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 삼아본다.

그저 뭔지 모를 내 안의 갈증 풀어줄 샘물 하나 있었으면 했다. 처음부터 대단한 유전이 터지길 바라고 땅을 파기 시작한 게 아니다. 무턱대고 느낌만으로 맨땅에 삽질하다가 도로 덮기도 여러 번, 피부로 느껴지는 갈증은 더해만 갔다. 그러다 어느 날 웅덩이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퍼내면 다시 고이기에 드디어 내 샘이 터졌구나 싶었다. 우쭐했었다. 하지만 곧 그 물이 건천의 흙탕물이라 걷어내고 오래 가라앉혀야 겨우 목축일 정도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마저도 언제 마를지 몰라 늘 불안했다. 실망도 실망이지만 남몰래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성분이다. 몸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거면 주성분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듯싶은데, 그래서 그런지 몸은 부족하다 싶으면 알게 모르게 신호를 보내 필요한 수분을 섭취하게 한다. 사람들은 물 마시는 것 외에 수시로 상황과 기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음료를 만들어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확실히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운동 후 마시는 이온 음료, 좋은 사람과 나누는 차 한 잔, 비 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응원하며 먹는 치킨에 맥주 등등. 그때그때 느껴지는 신호에 따라 그때그때 최적의 방법으로 갈증을 푼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한 해갈(解渴)엔 역시 물이 최고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내 몸이 생수를 원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샘을 파는 사람이 되었다. 꾸준히 파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느 틈으론가 조금씩 맑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고생하고 얻어 마시는 물맛은 그간의 노고를 싹 잊게 할 만큼 짜릿하곤 했지만, 아직 한나절을 기다려야만 겨우 물 한 모금을 얻을까 말까인 게 문제이다. 그래서 늘 목마르다. 어렵고 힘들어도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분명한 이유랄까. 뼛속까지 맑게 해줄 샘물이 끊기지 않을 때까지 나의 샘 파기는 계속될 것이다. 어쩌다 지친 새 한 마리 날아와 내 샘에서 목축이고 간다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해지겠지?

산이 깊을수록 옹달샘은 마르지 않고 거대한 암반 지역 저 밑에서 끌어올린 물은 언제나 차고 맑다. 영혼의 글 샘 역시 깊은 성찰 과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닐는지. 나는 글 샘을 파는 사람, 산처럼 묵묵히 깊어져야 하리라. 단단한 바위일지라도 쉼 없이 깨고 쪼기를 게을리하지 말 일이다. 어느새 어깨동무해줄 든든한 동반자들도 생겼고, 성실히 마련한 장비도 틈틈이 벼리어왔으니 앞으로의 3천6백5십일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신나고 속도가 붙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어디쯤에서, 끝내는 멈추겠지만 누군가 내 작업의 흔적을 발견하고 계속 이어서 파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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