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덕
서로 덕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11.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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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남편은 드립 커피, 나는 달달한 믹스커피. 커피 취향부터 음식취향까지 서로 다른 부부다. TV에서는 네 팀의 부부가 출연하여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었다고 서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원망이라고는 하지만 잘 들어보면 몇 십 년을 함께 산 부부의 투정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부부들이 당신 덕에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그라미 팻말을 들어보라는 사회자의 말에는 일제히 동그라미를 들었다. 아쉬움이야 있었지만 그래도 당신 덕에 여기까지 왔노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덕에 살았지?”하며 남편을 쳐다보자 남편은 “아니 나는 당신 덕에 살았지. 나야 회사 다닌 것밖에 없는데 당신 덕에 이만큼 살았지. 나는 당신 덕에 살았어”하며 재차 강조했다. 평생 주야 맞교대 근무를 하며 가족을 부양해온 남편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양말 한 짝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남들 다 하는 취미활동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회사 다닌 것밖엔 한 것이 없다며 모든 공을 내게 돌렸다.

다니던 회사를 정년퇴직한 남편은 아파트 관리실에 취업을 하였다. 출근한지 이틀 만에 화재가 나서 입주민이 사망하는 사건을 목격하였다.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사망한 어느 남학생의 시신을 거두고 온 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낸 관리비로 왜 당신들이 에어컨을 맘 놓고 켜냐는 입주민의 항의를 한 시간 이상 듣고 온 날도 있었다. 맘 여린 남편에게는 힘든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낡은 기타 하나를 들고 왔다. 입주민이 버린 것을 쓸 만해서 들고 왔다는 것이다. 평생을 취미라고는 가져보지 못한 남편의 첫 취미생활이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튜브로 혼자 공부도 하고 동사무소에서 하는 기타 수업도 받았다. 손녀딸 생일 날 생일 축하노래를 기타 반주에 맞춰 불러 주었다가 “할아버지, 내년에 다시 잘 불러줘.” 라는 수모 아닌 수모를 받기도 했지만 이젠 실력이 늘어서 공연을 다니기도 한다.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남편을 볼 때면 나는 언제나 눈물이 솟는다. 돈 버는 일이 아닌 자신이 즐거운 일을 이제야 해보는 남편의 다소 늙은 모습은 언제 봐도 나를 눈물짓게 한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요양원에 실습 나갔을 때의 일이다. 같은 병동에 남편과 아내가 함께 입소해 있었다. 콧줄로 영양공급을 받는 남편과 하반신을 못 쓰는 아내는 점심시간이 끝나면 휴게실에서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남편의 모습이 보이면 아내는 금세 함박웃음을 웃었다.

핏기 없는 두 손으로 꽃받침도 해 보였다. 남편은 모아두었던 베지밀이며 빵을 들고 나와 아내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어여 먹어.” “잠은 잘 잤는가?” 남편은 언제나 두 마디의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두 마디에 남편의 마음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 아내의 얼굴은 아직 예쁜 여자였고 아내와 있을 때의 남편은 아직 건재한 가장이었다.

사람은 배우자와의 사별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친구는 자기 몸의 반쪽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별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팔 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다고 했다. 다소간의 불협화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서로 덕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지금 당장 못 느끼고 있을 뿐이지 부부는 서로의 한 쪽 팔과 다리가 되어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진리를 조금만 더 일찍 깨닫는다면 남편을 우리 집 웬수니, 그 인간이니 부르는 일은 지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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