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3.11.20 1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찾아오는 노을처럼, 늙으면 실명될 테니 젊음을 잘 유지하란 의사의 말이 적중했다. 날이 더할수록 시력을 잃어감을 어찌 붙잡을 수 있나. 한번 찾아와 정착한 실명은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 투병 생활을 하게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명언을 되새기며 오늘도 새벽안개 짙은 길을 세상의 하나뿐인 영원한 동반자의 손을 잡고 교회로 향하는 발길이 우리 부부 하루의 시작이다.

인생극장처럼 지나가면 좋으련만 기왕에 찾아온 장애를 어쩌랴, 봄에 꽃을 피워 맺은 열매를 가을이면 거두듯 남편의 장애를 열매로 알고 보듬으며 내 마음 밭에 사랑으로 심어야겠지. 그리고 꽃을 가꾸듯 봄이면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작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남편을 화분 옮기듯 손잡고 데려다 의자에 앉히고는 커피 두 잔을 들고 가 한잔을 손에 들려주고 마주 앉아 마시며 햇살을 친구 삼아 놀라고 한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진 곳으로 옮겨 주고 겨울이면 따뜻한 방으로 화초가 햇볕을 따라다니듯 남편도 계절 따라 옮겨가며 산다.

보이지 않아도 화장실, 베란다, 식탁이 놓인 주방은 손이 더듬이가 되어 홀로 찾아가는데 유독 방에서 나와 거실을 지나 현관을 향해 가는 동안에는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 멀지도 않은 길인데도 매번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수할 적마다 얼마나 속상할까 애잔한 맘에 손으로 줄을 잡고 걸으면 옆길로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번 득 든다.

남편 방에서 현관까지 공중에 줄을 매었다. 방에서 나오는 남편의 손을 잡아 팔을 올려 줄을 잡게 하고 이 줄 따라 걸으면 현관문이라 일러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 “이게 철로야. 이탈하면 사고 나요.” 피식 웃는다. 수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사고는 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남편은 공중의 줄이 길이 되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 않지만, 남편에게는 아주 요긴한 도구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우리가 생활하는데 편리하면 그만이지 라며 바라보는데 80년대 만화영화 주제 `은하철도 999' 노래가 생각난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며 은하수를 건너서 (중략)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은하철도999' 맞아 이 줄은 비록 플라스틱을 꼰 줄이지만 남편을 싣고 달리는 철로다.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는 기계 부품만 교환하면 천년은 물론 이천년도 살 수 있는 기계 인간의 몸을 무료로 얻기 위해 신비로운 여인 메텔과 함께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로 가는 기차 여행에 오른 철이가 각 행성을 이동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를 담은 내용이다. 자녀를 키우며 아무 생각 없이 듣던 노래인데 새삼 늙어서 이 노래의 의미가 생각나다니.

우리 집을 방문하는 이마다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일어나 남편처럼 손으로 줄을 잡고 방을 향해 걸어 보인다. 그제야 화통하게 웃으며 기막힌 발상이라며 귀한 보물을 어루만지듯 손으로 보듬다 잡고 걸어본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다용도에 맞게 쓰임 받지만, 이 플라스틱 줄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철로로 쓰임 받을 줄을 누가 예측했겠느냐며 감탄한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요양사가 왔다. 공중에 가로 놓인 줄을 보고는 이 줄이 무슨 줄이냐고 묻는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며 “남편을 태우고 달리는 철로야.” 웃으며 어찌 이런 생각을 했냐며 예사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하는 말 다음 집에 이 아이디어를 전수해야겠다며 한 수 배워 간다고 좋아한다.

삶이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건재한 남편이 시각 장애 일급 명찰을 다룰 줄 상상이나 했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