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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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숙 괴산교육도서관 관장
  • 승인 2023.11.2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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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 읽기
김현숙 괴산교육도서관 관장
김현숙 괴산교육도서관 관장

 

제주도의 가을은 언제나 황홀하다. 제주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가 가득한 새별오름 위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석양 풍경이 그 대표가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 올해도 운 좋게 제주의 가을을 온몸으로 품을 수 있었다. 제주의 볕은 따뜻했고, 제주의 바람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고, 제주의 맛은 배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검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20년 지기 단짝 친구처럼 찰떡같이 어울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던 중 작은 서점을 만났다. 제주의 여느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서점은 책이 가득했고, 주인장의 친필 감상평이자 추천 글이 책마다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주인장의 강추!'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책을 마주했다. 한 손으로 들어도 적당한 판형의 책은 흰 표지에 82.7이라는 숫자만 강렬하게 박혀있다. 82.7이라는 숫자는 2017년 기준 대한민국 기대수명이란다. ISBN도 부여받지 못한 독립 출판된 책이고, 작은 서점에 마지막 남은 책이라는 주인장의 말에 라스트 오더를 재촉하는 홈쇼핑 제품처럼 홀린 듯 품에 안고 온 책을 지난 주말, 비닐 옷을 벗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제주의 향이 나는 듯하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쓴 에피소드들을 읽을 때마다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고, 격렬한 동조를 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그 중 `이별 계산기' 에피소드에서 책장이 머문다. 출가를 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를 부모님을 만난다고 가정한다면 계산식=(평균수명-부모님 평균연령)×1년에 만나는 횟수라고 했을 때 나의 상황에 대입해보니 (82.7-71)×12=200.4일…. 앞으로 1년 365일에도 못 미치는 날짜만큼만 부모님을 만나고 이별한다는 계산식을 보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조급해진다.

며칠 전 친정 아빠를 모시고 서울병원을 다녀왔던 일이 떠오른다. 강원도에 계신 아빠를 모시고 서울병원 진료를 보고 돌아온 일이다. 오랜 시간 운전해서 병원에 도착하고 진료를 받는데 담당 의사는 채 1~2분도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고 아빠의 처방약에 대한 불편을 호소하자마자 자리를 떠나버리는 의사의 태도에 무척 화가 났던 일이다. 환자가 의사에게 불편을 호소할 수도 있는데, 아빠는 괜히 그런 말을 꺼내서 의사 심기가 불편했나 보라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 소심히 내뱉는 아빠 목소리에 괜히 내가 울컥했던 날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쎄고, 못하는 것 없이 척척 해내던 아빠였는데, 그런 아빠의 나이 듦이 느껴져 속상했던 하루가 책을 읽는 내내 떠올라 코끝을 찡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엔 검정 종이에서 회색 종이를 지나 흰 종이가 여러 장 끼워져 있다. 아마도 사람의 검은 머리에서 흰머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종이로 표현했지 싶다. 사르르륵 책을 넘기며 나이 듦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사르르 넘어가는 책장에 이는 바람에 인생의 속도와 인생의 무상함에 덜컥 겁이 난다.

한씨외전(韓氏外傳) 중 주나라 `고어'와 `공자'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樹慾精而風不止 子慾養而親不待

往而不可追者年也 去而不見者親也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이를 기다려 주지 아니한다

가버리면 되찾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떠나가면 만나 뵐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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