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녀
그 소녀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11.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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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버스가 달린다. 막바지로 치닫는 가을의 풍경이 지나간다. 글을 쓰는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에 함께 했다. 버스를 타는 것도, 문학기행을 가는 일도 오랜만이다. 우리의 목적지가 황순원 문학관이라는 게 마음에 끌렸다. 작가의 작품 중 `소나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곳이 마침 이 소설을 배경으로 조성된 소나기 마을이라니 설렌다. 왠지 모르게 술렁이는 마음이다. 한눈팔지 않고 마음 길을 따라가 볼 참이다.

경기도 양평의 문학관에 도착했다. 처음 눈에 들어 온 건 쭈그려 앉은 소년과 소녀의 동상이다. 보기만 해도 애틋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징검다리와 개울의 섶다리도 재현해 놓았다. 두 주인공이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도 보인다. 소환된 둘이서 바짝 붙어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소나기는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소녀를 아프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짧은 사랑을 내포한다. 순수한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을 담은 이 소설은 어린 나이에 시련을 겪는 소년을 통해 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접했을 때 나는 주인공인 소녀가 되었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소녀가 된다. 이름을 쓰지 않고 3인칭인 소년과 소녀로 묘사한 게 인상적이다. 글을 읽는 이들 모두가 스스로 주인공인 양 느끼게 된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둘이서 비를 피하던 수숫단이 나를 멈춰 세운다. 다시는 소녀를 보지 못하는 장소가 된 곳. 이별의 장소가 된 거기서 수줍음 많던 한 소녀를 만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닌 낯익은 얼굴이다. 열 살의 소녀는 늘 혼자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 오빠는 대학에 가면서 타지로 떠났다. 오빠 둘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녀 늦게야 집에 왔다.

혹독한 가난으로 농토가 별로 없는 우리 집은 엄마를 밖으로 내몰았다. 남의 일을 다녀 어둑해져서야 볼 수 있는 엄마에게 투정도 할 수가 없었다. 온종일 술타령으로 하루를 보내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은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인데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아 욱신거린다. 내가 술을 무척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그들은 엄마와 함께 있다. 다른 애는 동생들 보느라 정신이 없다. 괜한 눈치만 보다가 슬며시 오기가 일쑤다. 막내인 나만이 홀로 집을 지켰다. 방까지 쳐들어오는 겨울의 추위는 외로움까지도 더 파고들었다. 가족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긴 고문이었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껍데기 속으로 자꾸 숨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든 작은 그 애를 애써 외면해 왔다. 아는 척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빙하로 녹아내릴 것만 같아 질끈 눈을 감았다. 어른인 지금까지 그 애 때문에 아프다. 그녀와 마주친 지금, 용기를 내야 한다. 예서 머뭇거리면 평생 후회하게 될 테니 말이다.

`어린 재정아. 너무 외로웠지? 괜찮아,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야. 너무 늦어 미안해' 내가 외로운 나를 안는다. 켜켜이 외로움이 환해진다. 사르르, 햇살 같은 홀로움이 퍼지고 있다. 황순원 작가의 아들인 황동규 시인이 찾아낸 예쁜 말이다. 소녀가 내게 묻는다. 왜 오늘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느냐고. 내가 내게 대답한다. 소나기를 피할 수 없었노라고. 너를 귀찮도록 찾아갈 생각이라고. 이제 내 안에 소나기 속의 소녀로 남는다. 6학년 올라가면서 전학을 간 소년이 문득 보고 싶어지는 이유가 된다. 내 발 앞에 낙엽이 서풋 앉는다. 바람에 묻어온 안부라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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