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도 나오기도 어려운 용기
내기도 나오기도 어려운 용기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11.0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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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화장실과 본체가 분리된 형태의 구조였다. 악취를 피하고 청결과 위생을 위한 방편으로 대대로 내려져 온 구조지만 아이들에겐 무서움을 극대화 시키는 장소다. 그 시절 이야기가 실린 그림책이 있다. <모치모치 나무/사이토 류스케/주니어랜덤>라는 일본 그림책이다.

마메타는 산속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다섯 살이 된 아이다. 아버지는 곰과 맞붙어 싸울 정도로 담이 큰 이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마메타는 뒷간 가는 일조차도 할아버지를 대동해야 한다. 다섯 살 아니라 열 살이어도 무서울 야밤의 뒷간 행을 할아버지는 `… 조차도'란 표현으로 아무 일도 아닌 듯 치부하지 않고 늘 동행 해 준다.

오두막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모치모치 나무'라는 마메타가 지어준 이름을 가진 칠엽수 나무다. 가을이면 그 열매로 떡을 쪄 먹기도 하고 대낮에는 나무 밑에서 마메타가 놀기도 하니 할아버지는 집을 보호해 주는 수호 나무쯤으로 여길 거다.

그러나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한밤중의 무지무지 큰 나무는 마메타에게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나오던 오줌도 쏙 들어가게 할 정도로 말이다. 마메타는 그 정도로 겁이 많은 아이다. 허나 할아버지는 기다려준다. 가엽고 사랑스러운 마메타가 스스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도록 기다린다. 모치모치 나무에 기묘한 자연의 현상을 얹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다린다.

“동짓달 스무날 축시엔 말이다 모치모치 나무에 불이 켜지지. 자지 말고 있다 봐 보거라. 참 아름답단다. 이 할아비도 어릴 때 본 적이 있어. 죽은 네 아비도 봤다더라. 신신령의 축젠데, 딱 한 아이만 볼 수 있단다. 용기 있는 아이만 말이다.” 가지가지에 온통 불이 켜져 꿈꾸듯 아름답게 빛나는 모치모치 나무를 보는 것에 대한 미련은 남지만 마메타는 일찌감치 포기한다. 지금의 마메타에게 용기는 내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임을 일찌감치 안 것인가보다.

나 또한 어릴 적 겁이 많은 아이였다. 용기를 내려고 아무리 맘먹어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던 경험이 허다했다. 그놈의 용기가 도대체 뭐길래 그리도 나오지 않아 속을 썩이던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내게 시간과 아이들은 내 안에만 있던 용기를 나오게 했다. 초보 엄마 시절 역시 용기를 내 보려 무진 애를 썼다. 열 번을 되돌아봐도 용기 내지 못함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그 되돌아봄이 차곡차곡 쌓여 내 안에 무늬로 남아 있다. 그 무늬들이 나는 좋다.

마메타에게도 무늬를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한겨울 한밤중 할아버지가 배를 움켜쥐며 방바닥에 푹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메타에게 온 우주이며 삶의 전부인 할아버지! 마메타는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렸다. 무섭고 춥고 발에서 피가 나 아팠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게 할아버지의 죽음이었기에 마메타는 참고 달렸다. 무서움 많던 어린아이 마메타에게서 용기가 나오는 순간이다.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의 등에 업혀 오두막으로 오는 동안 마메타는 드디어 봤다. 할아버지도 보고 아빠도 봤다는 모치모치 나무에 불이 켜지는 모습을 봤다. 용기 있는 딱 한 아이를 위해 산신령이 펼치는 꿈 꾸듯 아름다운 모치모치 나무를 봤다. 한겨울 밤의 보름달과 별과 흩날리는 눈의 조화로움에 마메타의 마음에서 절로 나온 용기가 얹어져야만 볼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본 것이다.

용기는 그런 것같다. 아무리 내려고 용을 써도 나오지 않을 수도, 내지 않으려 해도 어느 땐 느닷없이 나오기도 하는 아주 오묘한 놈인 듯싶다. 그 용기를 난 지금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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