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열두 고개를 넘으며
가을, 열두 고개를 넘으며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3.11.0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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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햇볕과 바람과 조우하며 인내로 다져진 나무의 결실을 본다. 홀로 붉어질 수 없는 단풍처럼 수많은 사람과 관계 맺으며 지금의 내가 있다. 아름다운 계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가을에 생각나는 사람은 가을 산을 연상시킨다. 높고 깊은 산속에서 수련된 도인의 기질이 있다. 덕망과 인품이 출중한 스승님과 일정을 마치고 유량로를 따라 흑성산 열두 고개를 넘는다.

이번 가을에는 덩치 크고 과묵한 사람이 생각이 난다. 오늘 내가 있기까지 많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스승님이 몇 분 계신다. 스승님을 빛나게 하는 건 제자의 역량이라고 아는데 내가 얼마나 성장해야 그분의 덕망과 인품의 그림자를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스승님을 존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짧은 말씀에도 긴 울림이 있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삼 개월 정도는 겪어봐야 상대를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짧은 만남에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마치 설익은 잎이 떨어져 뒹구는 빛바랜 낙엽이 아닐까? 설익은 사람과 만남은 일회용처럼 가볍게 잊힌다.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스승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한때 문창과를 다녔는데 말수는 적어도 한 마디 던질 때마다 내게 울림을 주신 분이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건강이 좋지 않지만 내게는 늘 그때 그 느낌으로 간직되어 있다. 넉넉한 분이라 아마도 제자 여러 명을 품어도 자리가 넉넉하리라 생각이 든다.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려고 했는데, 당신께서 점심을 사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는 문자가 왔다. 대답은 알았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만일을 대비해 손수 기른 고구마랑 고추, 상추와 시장에 들러 귤과 달걀을 샀다. 나의 작은 정성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15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일행분이랑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점심은 갈비 1번지 집에서 먹었다. 역시나 점심값은 스승님이 미리 내셔서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그분 곁에는 멋진 분들과 마음씨 고운 꽃님이 언니가 있다. 꽃님이 언니는 바쁜 관계로 2차에 리각 카페에서 동석했다.

리각 카페는 태조산을 마주한 조각 공원 안에 위치한다. 리각은 조각가 이종각 선생님의 가운데 종자를 빼고 지어진 이름이다. 카페와 미술관이 연결되어 있어 상시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공백을 채워가는 `사유의 場' 이란 제목으로 여섯 명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전시회를 잠시 뒤로 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보다 한 걸음 빨리 꽃님이 언니가 도착했다. 앉아 있다가 보니 교수님 앞으로 덕망 있는 멋진 분들이 인사를 하고 간다. 이 언덕의 주인장인 이종각 선생님도 동석했다. 카페에서 왕건이 다녔다는 태조산을 바라보다가 스승님을 보는데 가을 산을 닮았다.

석양이 단풍에 익어갈 때 우리는 은행로를 지나 열두 고개를 넘었다. 열두 고갯길은 스승님이 이 길로 다니시며 지은 이름이다. 돌아가는 굽이마다 향기가 서린다. 어떤 스승은 본인을 치켜주기를 바라며 땡그랑거리는가 하면 어떤 스승은 당신의 덕망과 인품을 드러내지 않고 과묵한 분도 계신다. 멀리서도 그분들의 그림자를 생각하며 각박한 세상에 삶의 지표를 열어주는 스승님. 밥 한 끼 대접하러 갔다가 산해진미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오는 느낌이다. 훌륭한 스승님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덕망과 인품을 그림자 삼아 좀 더 분발해야겠다. 훗날 윤혁민 스승님을 조명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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