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팔이
함 팔이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11.0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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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가을의 막바지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이 바짝 코앞으로 다가오리라. 옷장 정리를 했다. 철지난 옷들은 농속으로 들여보내고 지난봄에 갈무리해 둔 겨울옷들을 정리했다. 붙박이장에 쟁여놓은 무거운 옷상자들을 모두 꺼내 놓으니 바닥에 짓눌린 청색과 홍색의 비단이 바짝 엎드렸다. 옷 정리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털퍼덕 주저앉아 청홍 비단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이때다 싶게 뒷방 늙은이 이제야 숨 좀 쉬어보자는 듯 청홍 비단이 나를 34년 전으로 데려간다.

12월 초였다. 매섭던 겨울바람도 그날은 눅잦히어 안온한 밤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하느라 부산하셨고, 아버지는 초조한 낯빛으로 마루를 서성이셨다.

“함 사세요! 함 사세요! 함이요 함!”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외침에 언니와 오빠들은 기다렸다는 듯 부리나케 나갔다. 신부된 도리로 얌전히 방안에서 기다려야겠지만 궁금한 마음에 나도 슬그머니 마루로 나가 보았다. 아마도 남편이 친구들에게 너무 멀리서부터 시작하지 말라고 귀띔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담 너머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목을 길게 빼고 활짝 열린 대문과 담을 넘겨다보며 함을 사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중 청사초롱 불을 든 함진아비의 우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징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남편의 친구 중 제일 먼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난 사람이었다. 한손으로는 커다란 함을 그러 맨 걸개를 그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청사초롱 불을 쥐었다. 그 옆에서 사내 서너 명이 싱글벙글이다.

함을 팔라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언니는 술과 안주가 놓인 앉은뱅이 상을 함진아비와 친구들 앞에 놓고 술을 권했다. 친구들은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하지만 술 한 잔 했으니 들어가자는 언니와 오빠들의 설득에도 함진아비는 딱 버티고 서서 꿈쩍도 안했다. 언니와 오빠는 알았다는 듯 흰 봉투를 대문을 향해 한 발짝씩 밟을 수 있는 거리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함진아비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진아비 옆에 있던 친구들이 봉투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지 않겠다는 신호다. 함 꾼들과 우리 가족 간에 실랑이를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가세를 했다. 결국 동네사람들과 언니 오빠들이 구슬리고 등을 떠밀어 함진아비가 마루로 올라서자 함 팔이는 끝이 났다. 온 동네가 함 팔이로 잔치가 되어 들썩였던 그날의 풍경이 어제 일처럼 아삼아삼하기만 하다.

얼마 전 큰 딸아이의 혼사가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의 혼사에는 함을 팔고 사는 일은 없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자식들의 바쁜 직장일도 그렇고 세태가 그러하니 번거로운 일은 삼가자는 사돈 간 의견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에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모른다. 함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혼 예물은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결혼식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런 모든 걱정이 기우가 되고 대부분의 관례도 없어지니 마음도 몸도 편한 건 사실이었지만 왠지 씁쓸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함을 파는 것이 당연한 결혼 의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음문제도 그렇고 번거로운 탓에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부터 차차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주변에서 자녀의 혼사가 있어도 함을 팔거나 사는 일은 없다. 있다 해도 신랑이 혼자 조용히 신부 집에 가져다 줄 뿐이다. 바쁜 세상이니 모든 것이 간소화 되었다. 바쁜 세상, 모든 것이 그에 맞게 살아야 하나보다.

요란하게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그쳤다. 해가 쨍하게 창으로 들어왔다. 다시 천홍 비단을 농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갈무리한 여름옷이 담긴 상자로 덮어 놓았다. 내년 봄이 끝나갈 무렵 불현 듯 또 만나자는 약속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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