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로 피어
상사화로 피어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3.11.0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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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심억수 시인
심억수 시인

 

제23회 영광 불갑산 상사화 축제장을 찾았다. 축제장을 향해 가는 길 자분자분 비가 내린다. `상사화 꽃길 속으로, 천년의 사랑 속으로'라는 주제로 펼쳐진 축제장 주변 상사화가 비를 맞아 처연하다.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의 풀잎처럼 우린 쓰러지지 말아야 해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서 우리 미워하지 말아야 해~” 빗속에서 들리는 노래가 가슴을 파고든다. 애잔한 떨림의 멜로디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그리움으로 울컥 감정이 북받친다.

상사화의 꽃말이 `참사랑, 순수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황량할 것이다. 황폐한 감정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우리 마음에 자리한다.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라 등으로 표현된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정열적인 사랑이다. 아가페는 신과 인간 사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필리아의 사랑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는 것 같이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다.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며 상사화 향기를 나르는 바람을 본다.

생각해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상사화 향기를 나르는 바람처럼 아버지는 나를 위해 한없이 헌신하셨다. 계곡물처럼 조급하게 내려와 강물 속 바위에 부서지던 무모한 아들을 위해 노심초사하신 아버지. 그 심연의 바다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흙탕물에서 허우적대던 불효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후회하며 아버지의 가없는 사랑을 생각한다.

왁자지껄 관광객이 무리 지어 온다. 대부분 어르신이다. 남녀 구분도 없이 경계도 없이 부산하다. 상사화 군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의 시선은 소로에 전시된 시화 작품에 머물러 발걸음이 느려진다. 문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 동병상련의 마음이 되어 한참을 서성이었다. 야외에 전시된 조각작품도 둘러보고 실내 전시관에 마련된 수석과 서예 작품도 감상했다.

예술작품을 느릿느릿 관람하고 상사화 꽃길 따라 금강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들어서자 대웅전이 중생을 맞이한다.

빗속을 조용조용 걷는 참배객의 성숙한 불심에 내리는 빗소리마저 엄숙하다. 불자는 아니지만, 대웅전에 들려 아버님의 극락왕생과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사랑은 논리적이고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다. 사람에 따라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사랑은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온다. 느끼지 못하는 찰나에 피었다가 홀연히 지는 상사화 같다.

어떤 사람은 짝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했다.

짝사랑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사랑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란다. 그런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다 했던가. 불갑사 경내 붉게 핀 상사화는 속세의 처녀를 짝사랑한 스님이 죽음으로 환생한 참사랑이요, 그리움일 것이다.

불갑사 대웅전 법당문을 나서자 비가 멈춘다. 흰 구름이 불갑산을 휘감고 오른다.

삼 년여 날을 병상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환영이 구름 속으로 걸어간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이 화해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가없는 참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상사화로 피어 가슴 울먹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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