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승인 2023.10.2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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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거리를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마치 90년대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던 구멍가게처럼 눈에 쉽게 보인다. 주간보호센터나 노인 요양원이다. 콘텐츠와 프로그램이 다양해서 경쟁적으로 세워졌다 없어지는 이런 곳은 노인을 위한 공간이다. 골목에 초라하게 간판을 걸었든 큰 사거리에 빌딩 몇 층으로 된 공간이든 나이 들어 나도 가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습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 배어 나온다.

여름 동안 한시적으로 독서모임을 했다. 나이 듦에 관한 독서였는데 그중에 <어느 할머니 이야기>라는 동화도 함께 읽었다. 가벼운 치매가 시작된 할머니의 지혜로운 하루 살기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법한 할머니는 초 긍정 에너지가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세계대전 중 남편이 게슈타포들에게 잡혀가 가족들과 몇 해 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고, 아들도 잃었다. 이민과 전쟁, 가난 등 삶의 여러 고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한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는 지금은 홀로 남아 지난 인생을 행복하게 추억한다. 나의 좁은 인간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할머니의 포스를 읽어 내려가며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아타락시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설정한 정신적 평정 상태를 뜻하는 개념으로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동요 없이 고요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여 그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 목표는 쾌락이며 유일한 선이라고도 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초적인 `쾌락'이 아닌 금욕주의에 입각한 정신적 쾌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은 즐거움을 보태는 게 아니라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누군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그의 재산을 늘려주기보다 그의 욕망을 줄여주는 것이 낫다고 말했으며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자는 불행하다고도 했다. `물과 빵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도 했다.

땡볕 아래 중앙공원 어느 구석에서 윷놀이하거나 멱살을 잡거나 삼삼오오 모여 정치 얘기로 알은체를 하거나 비슷한 또래의 할머니 치마 속엔 무엇이 있나 힐끔거리는 풍경은 사계절 내내 보고 또 보아도 지겹지 않다. 하지만 오가는 많은 이들은 비림공원이라고 칭할 만큼 역사적인 비석이 모여 있는 곳인데 노인들이 많아 드나들기조차 어렵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먼 산만 바라보시는 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며 지나치게 쳐다본다. 쳐다보는 눈빛에 읽히는 처연함과 부러움, 그리고 아쉬움이 뚝뚝 떨어진다.

전쟁과 삶의 고단함을 지나온 시간에 쌓인 그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안쓰럽다. 살아내느라 보낸 시간은 덧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나이와 병밖에 없다는 그들에게 평화와 안식은 사치인가. 20년 뒤의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다.

오래된 중앙공원의 아타락시아는 어떻게 오는가. 손바닥만 한 햇볕에 감사하고 절기에 해야 할 것을 누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라고 좋으니 서로 내어놓고 한바탕 울어라도 본다면, 결국 흔한 말이지만 평화는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다. 나이 듦의 자신을 환대하고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즐거움이었다는 고백의 빈도가 많아질수록 나와 중앙공원의 아타락시아는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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