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줍던 날
도토리 줍던 날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10.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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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시골 형님의 묵 쑤는 솜씨는 한결같이 좋은 맛을 냈다. 젓가락으로 집으면 탱글탱글 흔들리는 찰진 묵을 조선간장 양념에 푹 찍어 먹으면 어떤 훌륭한 요리도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 맛있는 도토리묵을 못 얻어먹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형님을 대신해서 도토리를 줍기로 했다. 잘 익은 들깨가 꼬순내를 풍기는 깨밭을 지나, 가을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언덕을 올라 상수리나무 숲 가까이에 이르니 벌써 반들반들한 도토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때마침 바람마저 불어서 산등성이로 길바닥으로 도토리들이 후둑후둑 떨어져 내렸다. 이리저리 뛰며 정신없이 도토리를 줍다 보니 가져온 자루가 금방 불쑥 차올랐다.

도토리 줍는 거 구경이라도 한다고 따라오신 형님은 수북이 떨어진 도토리를 보고는 “미선이 엄마가 못 줍는 바람에 도토리가 많네.” 하신다. 주식투자를 잘못 해서 빚쟁이가 된 아들을 위해 도토리를 줍고 다니던 미선이 엄마가 얼마 전에 독사에 물려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그까짓 도토리 팔아서 몇 푼이나 된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다니더니…”하며 형님은 혀를 차셨다. 시골에서 돈 되는 일이 달리 없으니 도토리라도 주워 팔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선이엄마가 도토리를 줍다가 독사에 물렸다는 얘기는 계속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메뚜기만 날아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엉덩이에 나뭇가지만 스쳐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무섬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수북이 떨어진 도토리가 아까워 어물쩡대고 있다가 드디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푸른빛을 띈 커다란 뱀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본 것이다.

`저렇게 빠른 뱀이 소리 없이 다가와서 문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토리에 대한 미련이 싹 떨어져서 조금만 더 줍고 가자는 남편을 채근해서 산을 내려왔다.

형님은 도토리 줍느라 애썼다며 근처의 밥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다리를 저는 엄마가 지적장애가 있는 딸을 데리고 하는 밥집이었다. 늦은 점심이었는데도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붐볐다. 지적장애가 있는 딸이 반말로 주문을 받고 음식도 험하게 내려놓았지만 기분나빠하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정숙씨! 정숙씨!”하며 동생처럼 불러 주었다.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게 가르치기가 어려웠지만 이젠 정숙이 없이는 이 장사도 못한다며 다리 저는 엄마는 딸을 고마워했다. 모녀의 찐한 사연만큼이나 음식 맛도 진국인 시골의 작은 밥집에서 나는 괜스레 돌아가신 외할머니생각이 났다. 굽은 허리로 호박볶음이며 된장 씨레기국을 끓여 주시던 외할머니 음식냄새를 그 밥집에서 맡은 듯했다.

주운 도토리를 녹말 만드는 공장에 갖다 주고 오는 길, 형님은 일 년 양식을 마련했다며 흐뭇해하신다. 내년 한 해도 형님의 맛있는 도토리묵을 얻어먹을 생각에 뱀과의 신경전도 잊고 내 마음도 뿌듯했다.

손녀딸은 다람쥐 먹이라며 도토리를 줍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아직 줍지 못한 도토리가 산에 수북하니 다람쥐가 굶을 일은 없을 것이다. 벌써 몇 년 째, 도토리나무가 주는 양식을 다람쥐와 함께 나눠먹다 보니 왠지 다람쥐와도 한 식구가 된 기분이 드는 볕 좋은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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