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기
느리게 살기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10.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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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나는 요즘 느리게 사는 연습을 한다. 느리다는 건 나에게 들어오는 데이터(input)로부터 내가 내보내는 정보(output)까지의 간격을 최대한 늘린다는 걸 의미한다.

삶이 급하면 입력부터 출력까지의 간격이 없게 된다. 곧 입력되자마자 출력된다. 생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본능적인 행동일수록 급하게 진행된다. 눈으로 보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들이 있는데 그 단계들이 빈틈 없이 들러붙어 있어서 입출력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차를 몰고 가는데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칼치기로 끼어드는 차를 보면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경적을 울린다. 칼치기 차를 보는 작용과 경적을 누르는 행위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상대도 경적 소리를 듣자마자 화를 내며 앞에서 방해운전을 한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사태가 악화되면 누군가는 상대 차를 가로막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유리창을 부술 것이다. 최악의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만약 칼치기하는 차를 보고 화는 났지만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면 보복운전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곧 감정 동요에서 최종적인 출력까지의 단계에서 틈새를 벌려 놓으면 파국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파란 불이 들어왔다. 마음은 급한데 앞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경적을 울려봐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테니 참는다. 막 출발하는가 싶더니 굼벵이처럼 기어간다. 마음 안에서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차를 보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으로부터 상대에 대한 적의(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상대와 싸움은 하지 않지만 일어난 화를 삭이느라 마음이 불편하다. 원래 화를 내면 자신만 괴로운 법이다. 답답한 느낌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가 늘리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사단이 생기지 않고 화를 내지 않게 되면 답답하긴 하지만 괴로움이 훨씬 덜하다. 이 정도만 돼도 세상 살면서 사고 칠 일은 거의 없다. 다만 답답함을 해소하지 못해서 속이 썩을 뿐이다.

왜 답답할까? 앞차가 느리게 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느리게 가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답답함이 생겨난다. 느리게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서 멈추면 답답함이 생기지 않는다. 느리게 가고 있다는 인식과 들러붙어 있는 답답한 느낌을 떼어내면 답답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걸 떼어낸다고 해서 저절로 답답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고 나름대로 훈련을 해야 하긴 하지만.

앞차가 느리게 간다고? 그걸 어떻게 알지? 차가 움직이는 걸 봤으니까 안다. 여기서도 움직이는 걸 본다는 것과 느리게 간다는 인식을 떼어놓으면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곧 보는 작용과 인식작용 사이의 간극을 벌릴 수 있으면 답답함의 원인이 되는 느리게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본다는 건 뭐지? 본다는 건 눈과 그 대상이 만난다는 것이다. 곧 눈과 대상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 보는 작용이다. 눈과 대상이 없으면 보는 작용이 성립하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며 눈을 뜨고 있어도 암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눈과 보이는 대상을 떼어놓으면 보지 않을 수 있다.

눈과 대상을 뗄 수 있냐고? 가능하기는 하지만 쉽지 않다. 눈을 뜨면 바로 보이고 색이든, 형체든 운동이든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대상을 보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보는 눈과 대상을 따로 떼어본 적이 거의 없다. 눈 뜨면 즉각적으로 뭔가가 보이고 그것이 어떤지를 자동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떼어내기 어렵다.

나는 요즘 눈과 대상을 떼어내는 연습을 한다. 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른다. 다만 떼어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느리고 여유 있게 살 수 있는지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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