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사는 게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 승인 2023.10.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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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미처 손닿지 못했는지 아니면 몰랐는지 알고도 남겨둔 배려인지 이 계절 감나무 가장 높은 가지 끝 잘 익은 감은 날개 달린 것들의 몫이다. 긴 계절 비바람에도 나무에 악착같이 매달려 기어이 살아남은 감은 긴 계절 기어코 살아낸 새들의 먹이가 된다.

감 뿐 아니라 가을은 열매 맺는 모든 것들이 입 달린 것들의 먹이가 되는 계절이다. 그리고 입 달린 것들의 입으로 들어간 모든 것들은 결국 똥이 되어 다시 몸 밖으로 나온다. 똥도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거부 할 수도 없는 것이 세상이치이자 순리다.

똥 된다는 것 그것도 쉽지 않다. 발아한 씨앗은 단단한 땅을 뚫고 나와서는 뿌리를 내리고 계절에 맞게 잎도 꽃도 향기도 피워 내야한다. 친절하고 고맙게도 찾아와준 나비와 벌과 태양과 바람 그리고 하늘이 내려준 단비의 도움으로 어렵게 피워낸 꽃도 꽃잎을 버려야만 비로소 열매로 맺는다. 맺었다고 끝이 아니다. 어디 좋은 날만 있으랴. 비바람 무서운 날과 메마른 날들의 세월도 견뎌야 한다. 어떤 의미로는 똥에는 봄날의 향기도 여름날의 햇볕도 오색찬란한 가을도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똥은 온 계절의 함축이기도 하다. 똥도 윤회(輪回) 한다. 생의 마감인줄로만 알았던 몸 밖으로 내버려진 똥은 또다시 소생의 기회가 주어진다. 꽃피고 열매 맺는 것들의 밑거름으로 쓰여 진다면 온 계절의 모습으로 다시 환생할 수 있다. 꽃의 윤회(輪回)이자 똥의 윤회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중국 당나라 선불교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선문답으로 운문문언에게 던진 “부처가 무엇이냐”는 한 학인(學人)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불가(佛家)에서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화두(話頭)에 인용되는 유명한 선문답이다. 선문답(禪問答)이란 석가모니부처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그의 제자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이 미소를 지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했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가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다는 의미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부처가 마른 똥 막대기' 라니. 똥 막대기란 그 옛날 종이도 없고 있어도 화장지로는 쓰일 리 없던 종이 귀한 시절 뒷간에서 용변을 본 후 뒤처리용으로 사용하던 길이 약 30센티 정도의 나무막대기다. 사용 흔적과 결과물이 다 마르면 털어내고 씻어서 다시 사용하는 일회용이 아닌 다회용이었다. 사용법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선사들의 선문답을 보다보면 우문에 현답이기도 현문에 우문이기도 현문에 현답이기도 우문에 우답일지도 모르는 것들의 총집합이다. 이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그래서 난해하고 그래서 오묘하고 그래서 신묘하다. 어렵다는 얘기다. 이것이 “선문답하고 앉아있네”가 요즘시대에 대화상대가 동문서답을 하거나 일부러 회피하려는 답을 할 때 관용어로 쓰이는 이유다. 그러나 선문답은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은 말이기에 말이 되기도 하는 말이다.

문운선사의 선문답은 지금도 어렵고 필자는 여전히 어리석다. 그래도 공짜 절밥 얻어먹은 값이라도 하라며 답하라는 잔인한 요구를 받는다면 소심하게라도 이렇게 답을 하겠다.

`똥도 부처다'

또 다른 학인의 만법은 어디에서 오냐는 물음에 문운선사의 “똥 더미에서 나온다”는 답이 필자를 덜 소심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똥은 참으로 심오하게 또한 변화무쌍하게 세상에 존재한다. 마치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부처처럼.

사는 게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가? 세상은 원래가 내 마음처럼 될 수가 없다.

힘이 드는가. 잠시 똥이다. 힘이 나는가. 잠시 꽃이다. 지나간다. 어차피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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