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첫봄의 달
시월은 첫봄의 달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3.10.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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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경기도 광주의 작은 시골 마을로 정원을 공부하러 다닌 지 벌써 7개월째다. 3월, 빈 들판 같은 정원은 그저 넓게 구획 지어진 밭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듯한 빈 밭. 4월에는 새싹이 돋으며 푸른 빛이 감돌더니 무성한 5월을 지나 빛나는 6월엔 빽빽한 숲같이 우거졌다. 덥고 습한 7, 8월을 거쳐 9월엔 살짝 찬기가 돌며 초록빛이 살짝 변하더니 드디어 10월 가을빛이 완연하다.

지난주 정원 공부에서는 구근을 심었다. 카마시아, 수선화, 크로커스 튤립, 무스카리, 가을에 심는 추식 구근은 추운 겨울을 나야 꽃이 핀다. 꽃눈은 여름 고온기에 이미 형성되었지만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알뿌리들은 기온이 따뜻하다고 꽃을 함부로 피워내지 않는다.

겨울 즉 저온을 일정 기간 거치고 날이 따뜻해져야 드디어 봄이 왔음을 알고 꽃을 피운다. 어떤 이는 11월이 되어서야 구근을 심기도 하는데, 구근이 건강하게 추위를 이겨내려면 10월쯤 심어 구근이 물을 충분히 빨아들여 뿌리를 내린 후 겨울을 맞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 농부가 밭에 마늘을 심는 시기가 구근 심기의 적기다.

가을꽃은 봄꽃과 달리 키가 크고 우거진다. 튤립 키가 커서 크기를 줄여야 한다거나, 수선화, 크로커스, 민들레가 우거지듯 작은 숲을 이루는 것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봄에 심은 과꽃이나 해바라기가 가을에 얼마나 크게 자라는지를 상상해보면 가을 정원이 우거진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니 10월에는 그 우거진 꽃들이 서리를 맞아도 형태를 잘 유지할 수 있는지 살피고 쓰러진거나 꺾인 것은 정리해주어야 한다. 또 일년초의 꽃씨를 모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미리 여문 씨가 떨어져 돋은 로제트 형태의 화초는 미리 자리를 잡아 옮겨 심어 두는 것도 좋다. 아무것도 없는 봄에 자리를 잡는 것보다는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가을에 자리를 잡아야 그나마 균형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다. 정원가에게 시월은 파종하고 옮겨 심는 달이다.

그래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는 시월은 첫봄의 달이라 불렀다. 땅 밑을 살짝만 파 보아도 발아하는 어여쁜 어린싹과 고군분투하는 뿌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월이 되면, `봄이 왔으니 어서 나가서 심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이제 자연이 잠을 청하는구나 하는데 말이다.

선생으로 살면서 매년 시월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정원을 가꿀 때처럼 시월을 파종하고 옮겨 심는 봄이라 여겼던가? 임용시험을 앞둔 때라 학생도 선생도 바쁘게 살며 시험 준비에 급급하였다. 또 봄학기, 여름 계절학기 이어지는 수업에 몸은 지쳐 가을의 섭리를 깨달을 새도 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내년 봄에 미리 피울 꽃을 심거나, 새로 뿌릴 씨앗을 받아두거나, 내년에 잘 자리 잡기 위해 옮겨 심는 일까지 돌볼 틈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봄을 맞으면 또 급급하게 한 해 살기 바빴다.

정원 속에서 허리 펼 틈도 없이 잡초 뽑으며, 흙 뒤집으며 사는 정원 가꾸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가하고 느긋하며 평안한 모습을 본다. 자기가 할 도리를 다하고 자연의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그래서 차페크도 인간은 손바닥만한(일부 번역에서는 손수건만한이라도 했다) 정원이라도 가꾸어 보아야 한다고 했나 보다. 우리가 무엇을 디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작은 화단만큼 좋은 선생이 없으니 말이다. 지나온 1년, 화단만큼은 아니라도 좋은 선생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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