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미리내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3.10.04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6년 동안 소풍 장소는 늘 같았다. 학교에서 4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미리내는 단골 소풍지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넓은 광장도 있고, 오래된 성당도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경당도 있었다. 경당 아래에는 무덤이 있다고 했는데,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경당 아래 무덤은 미리내가 성지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경당에서 꽤 떨어진 한옥으로 된 성당 강대상 앞에는 무덤 속 주인의 턱뼈가 유리 상자에 넣어 놓여 있었다. 할머니들은 그 유리 상자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그 주변을 지날 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성스러운 상자임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무섭기도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황님이 그 시골 마을을 방문하신 것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이 전교 모든 학생이 가도 차지 않았던 미리내를 가득 채웠고, 코스모스가 나부끼던 등굣길을 교황님도 차를 타고 지나가셨다.

우리는 코스모스 사이에서 교황님께 손을 흔들었다. 몇 년 전부터 경당이 있던 자리에 피라미드를 닮은 어마어마한 성전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그 성전은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103명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시성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라고 했다. 교황님은 103인의 성인 시성을 위해 우리나라에 오셨고, 그 해 103위의 순교자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가 누구일까?

무덤 속 주인은 조선 최조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신부다. 그의 고향은 지금의 충남 당진 솔뫼, 7살에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했고 마카오에서 신학을 하고 상하이에서 서품을 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주로 용인에서 사역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 경기도 안성 깊은 산골 미리내에 묻혔을까?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사제는 참 귀했다.

어렵게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복음을 위해 애쓰던 그는 쇄국에 천주교를 사학이라 하는 나라의 명에 체포되었다.

그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이었으며 결국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사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나흘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엄중한 경계를 뚫은 것은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였다. 그는 파수 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이불에 싸서 가슴에 안고 등에 지며 험한 산길로 밤에만 걸어 닷새 만에 안성 미리내에 도착했다. 미리내는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 무사히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장했다. 그리고 그곳은 성지 미리내가 되었다.

한 소년은 목숨을 걸고 공부하여 조선 최초의 사제되었고, 한 소년은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하여 조선의 성지를 만들었다. 귀한 것을 내어놓을 때 더 귀한 것을 얻는다. 이제 10월 올해도 석 달 남았다. 3/4이 가버린 것 같지만, 실은 이제부터가 진짜 2023년이다. 귀한 것을 혹 아꼈다면 이제 내어놓자. 얻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아꼈던 것,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2023년은 완성된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그의 성상이 이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가 순교한 지 177년만인 올 9월 16일. 그의 성상이 바티칸 미리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미리내 경당 앞에서 보던 그 성상 그대로인지 내년에는 바티칸에 한번 가 보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