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 즈음에
이순 즈음에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10.0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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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윗세오름 표지석이 반갑다. 작은 배낭을 메고 가볍게 나선 길이 얼떨결에 예까지 올랐다. 늘 가던 산에 가려던 마음을 그이가 홀연 바꾼 것이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라산이다. 어리목으로 오르는 길도, 영실로 내려오는 길도 감탄이 쉴 새가 없다. 그 어떤 정원이 이보다 멋질까. 자연이 보여주는 위대한 풍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라는 구상나무가 숲을 이룬다. 따뜻한 곳을 싫어하는 나무는 더는 밀려날 데가 없이 산꼭대기까지 왔다. 죽어서 하얀 고사목으로 서 있는 모습도 이국적 풍경을 보여준다. 욕심도, 번뇌도 모진 세월에 쓸려간 해탈의 모습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올라보면 자연은 무언가를 꼭 보여준다. 고생한 대가를 준다. 그런 기대가 산에 오르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산하며 만난 병풍바위는 즐비하게 늘어서 하늘을 받치고 서 있다. 연이어 늘어선 오백여 개의 돌기둥은 나무와 어우러져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하는 풍광이다. 설문대할망의 아들인 오백장군들이다. 제주에는 아무리 강한 태풍에도 피해가 크지 않다. 한라산에 막혀 기세가 한번 꺾이어 힘이 약해져서다. 아마도 장군들 앞에 바람도 풀이 죽는가 보다. 볼수록 든든해 보인다.

한라산의 숲은 나무와 바위가 같이 어울려 살고 있다. 나무의 뿌리들이 바위를 휘감아 제 몸을 의지한다. 어느 날 씨앗 하나가 바람에 날아와 터를 잡았을 것이다. 바위는 씨앗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 품는다. 비와 바람, 햇살과 눈보라를 이겨내며 틔워낸 인고의 시간. 드디어 나무로 성장한다. 서로를 품고 다독이며 살아가는 숲이다. 숲처럼 품지 못해 더 힘들었던 삶은 고개 하나만 오르면 괜찮아지려니 하며 30대가 흘러갔다. 다시 오르막이 나타났다. 또 올라가야만 하는 40대는 이를 악물었다. 앞이 트인 평원을 기대했으나 오르막이 앞을 막아섰다. 좌절하고 싶어도 지금껏 참아낸 시간이 억울하여 다시 온 기운을 낸 50대. 기적처럼 평지가 나타났다.

앞이 보인다. 산꼭대기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키가 작다. 바람에 많이 시달린 탓이다. 덕분에 나무가 단단하다. 앉아서 가뿐 숨을 고른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게 뿌듯하고 스스로 대견하다. 숨 막히게 오른 후에 찾아오는 휴식. 달콤함은 길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이순을 향하는 둘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이의 건강 적신호가 우리의 삶을 낭떠러지로 치닫게 한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일지라도 여전히 서툰 내 삶. 나는 어설픈 게 아니라 마디게 무늬를 그리는 중이라고 위로한다. 이즈음에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리막보다는 차라리 죽을 만큼 힘들었던 오르막이 좋았다는 것을. 그때는 희망이 있어서 기대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앞에 닥친 역경을 견디고 나면 더 좋은 무언가를 보여줄 것을 믿는다. 힘들게 오른 산이 정상에서 한 수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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