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내린 나무
뿌리 내린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10.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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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묘목들이 빼곡하다. 삽목판이고 모종 플라스틱 화분이고 일회용 플라스틱 음식배달 그릇까지 송곳 하나 꽂을 틈이 없다.

수국에서 병꽃, 야래향, 배롱나무, 장미, 고무나무까지 한자리 잡고 눌러앉아 고개를 곧추세웠다. 강직하고 기세등등하다. 저 많은 묘목을 어떻게 언제 모조리 옮겨심을지 걱정이 앞선다.

여름 한철, 참 바쁜 나날이었다. 바람길을 만들고 햇살 길을 터주기 위해, 가지 치고, 버리기 아까워 모조리 삽수로 만들었다. 묵은 가지이건 새로 난 가지던 구분 없다. 수종별로 묵은 가지를 이용하기도 하고 새로 난 가지를 이용 하는데 아까워 무조건 삽수가 된다. 무더기로 쌓인 삽수는 삽목토에 꽂고 상토에 꽂고 질석에 꽂았다. 그마저 없으면 모래흙에 꽂고, 그마저 없으면 물에 꽂았다. 어느 하나 버리질 못하니 어느 하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마르지 않도록 살포시 다뤘다. 그러한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 하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모조리 새순을 올렸다.

두 마디씩 나누어 절단하고 아랫부분의 잎은 따 주었다. 윗잎은 삼분의 일 정도만 남기고 잘랐다. 절단 한 곳의 아랫부분을 소독한 칼로 비스듬하게 잘라 준다. 칼을 소독하는 데는 불을 이용한다. 그리고 물에 서너 시간 담가 두었다가 삽목토에 꽂는다. 물에서 건진 삽수가 삽목상자에 옮겨지는 순간은 전광석화이다. 저공비행으로 달려드는 모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줄 간격 꽂는 깊이는 오로지 그간 축적된 경험의 기술이다. 민첩하게 숙련된 손놀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다.

한여름, 일을 시작하기 무섭게 고랑을 타고 내렸다. 송골송골 맺힐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렀다. 이마의 땀방울은 바위 표면을 타는 가랑비처럼 흘러 흙으로 떨어졌다. 땅으로 떨어지는 땀에 같이 했던 것은 갑자기 내리는 빗방울이었다. 땅뿐만이 아니라 등짝을 때리더니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갯바위에 달싹 붙어 자라, 밀려드는 파도에 일렁이는 수초인 듯 이마에 붙었다. 손등으로 훔쳐 제쳐내 보지만 파도가 밀려 나가며 일직선이 된 감태가 되었다. 이런 젠장, 보태여 갑작스런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도 모기의 공격은 비

사이를 뚫는다.

비를 맞으며 하는 삽목 작업을 즐기는 이유, 삽수가 마를 일이 없다. 그리고 삽목하는대로 비가 삽목토를 적시며 고르게 펴주고 삽수를 고정시켜 준다. 삽목하고 물주는 번거로움이 없다. 그리고 뿌리가 잘 내린다. 삽목하고 그늘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비가 오늘 하늘이 그늘을 커다랗게 만들어 주니 그늘로 옮기는 일을 덜어 주는 셈이다. 물론 입은 옷과 몸은 밀착이 되어 일체가 된다. 모기에게 물리는 숫자는 더 느는 듯하지만 그래도 좋다. 삽수가 잘 자라기만 하면 되니 그로서 감사할 뿐이다.

비가 많은 한해였다. 새순이 모주의 잎과 같은 색을 갖췄다. 뿌리가 내리고 활착했다는 신호다. 한 치 두 치 정도 되던 나뭇가지들이 바램을 이뤄줬다. 기다란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삽목토에서 들어낸다. 삽목토를 잔뜩 움켜쥐어 딸려 오나 싶었는데 이내 상자에 떨군다.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잡아주고 도와준 흙인데 이별하기가 못내 아쉬웠던 듯싶었는데,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뿌리는 뽀얗다. 길고 여러 갈래의 뿌리가 오동통 튼실하게 자랐다.

보채지 않았다. 기다려 주는 시간,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만 주면 되니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적적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면 알아서 뿌리를 내리고 순을 틔웠다. 새벽녘 소리 없이 깨어. 또 하루의 시간을 더했다. 뿌리를 내리며 길을 만들고 몸집을 부풀려 틈새를 벌렸다. 비온다고 덥다고 이유 들어 일하려다 보면 실제 일할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녀석도 뿌리를 내리기 위해 구차할 이유를 들어 주저한 일이 없다. 그래서 또 하나의 모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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