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
수탉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9.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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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얼마 전부터 우리 부부는 고구마로 아침식사를 대신한다. 몇 수저 먹지도 않은 아침상을 차리고 치우는게 성가셔서 은연중에 합의를 보았다.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를 번갈아 먹는데 남편은 밤고구마를 나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호박고구마만 가려 먹는다. 밤고구마가 남아도 심심할 때 간식으로 먹으라며 남겨둔다. 밤고구마를 먹으며 나는 혼자 키득댄다. 고구마 하나 때문에 행복해 져서 콧노래도 솔솔 나온다.

하지만 세상사 어찌 콧노래 나올 일만 있겠는가? 경기가 악화되자 위태위태하던 남편의 회사에도 감원 바람이 불었다. 남자들에게 이 바람만큼 독하고 아픈 바람이 또 있을까. 몇 십년을 함께 해온 동료들과 생존권이 걸린 묵언의 싸움을 하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남편도 그 바람을 버텨내지 못하고 오랫동안 일해 온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걱정하는 나에겐 어디건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송별식을 하고 밤늦게 들어온 날 “가장이 안 됐으면 어땠을까 싶어. 그것도 괜찮았을 것 같아.”하며 여태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심중의 말을 했다. 일할 만하다며 허허 댔었는데 술기운에 핼쑥해진 얼굴은 그렇지 않다고 숨죽여 말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몸집이 작다. 결혼 전엔 키가 좀 작나 싶었는데 살다 보니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혼하고 30년 주야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한 번도 피곤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소리도 한 적이 없다. 회사에서야 무슨 일이 있건 집에 들어올 때는 놀다 온 사람처럼 항상 웃으며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걱정 없이 살았지만 남편은 후들대는 무릎을 혼자 잡고 일어선 날도 있었을 것이다.

볕이 좋은 날 남편을 따라 농장에 갔다. 이리저리 농장을 둘러보는데 남편이 나를 불러 닭장 속을 가리켰다. 모이를 주면 암탉들은 서로 먼저 먹으려고 먹이통이 뒤집어져라 난리를 치는데 수탉은 암탉이 다 먹을 때까지 뒤에서 지켜보다가 배부른 암탉들이 뒤뚱대며 물러날 즈음에야 남은 모이를 먹는다고 했다. 매번 똑같이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식구를 먼저 챙기는 수탉의 모습에 살짝 감동을 하였다. `미물인 닭도 제 식구를 저리 챙기는데…' 그러고 보니 요란스레 파드득 대는 암탉 사이로 머리를 꼿꼿이 들고 걷는 수탉이 유독 점잖아 보였다.

남편은 뒷마무리로 바쁘다. 비닐하우스 문을 돌멩이로 누르고 닭장 문도 닫혔나 다시 확인한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 아저씨다. 강아지 티를 벗은 풍산개는 주인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고개를 요리 빼고 조리 빼고, 닭장 속에는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푸드덕 꼬꼬댁 닭 몇 마리가 튀어오른다.

일을 끝낸 남편이 차에 오르려는데 수탉이 `꼬끼오' 우렁찬 목소리로 길게 한번 울었다. 남편은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지만 나는 그 울음소리가 같은 남자인 남편에게 보내는 수탉의 뜨거운 격려처럼 들렸다.

불쑥 “당신 다시 태어나면 내 마누라로 태어나라.” 말했더니 남편은 다시 태어나면 나보다 더 예쁜 여자 만나 알콩달콩 더 재미있게 살 거란다. 진심인 듯 아닌 듯 그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가만히 보니 진심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일은 또 새로 옮긴 일터로 걸어가야 할 사람이니 모든 걸 용서한다. 과속 방지턱을 덜컹 넘는 차가 우리를 태우고 집으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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