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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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9.2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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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지병을 앓는 친구가 황당한 일을 당해 심장이 벌렁댄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계속되는 치료가 호전되지 않아 기분도 전환할 겸 영화관에 갔단다. 주차하고 내리는데 야물게 머리를 묶은 열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빤히 쳐다보며 다가오더란다. 그리고는 더럭 옷소매를 잡더니 “얼굴에 외로울 고자가 그득해서 형제·자매 하나 없고 아들인지 딸인지는 몰라도 둘 있는 자식도 모두 산 넘고 물 건너가서 살겠어. 단명할 팔자야”하며 혀를 차더란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서 있는 친구를 향해 “종교가 있으면 믿음생활 열심히 하고 덕 쌓으면서 살면 큰 비는 피할 거야”라며 자선이라도 베풀 듯 한마디 더 하고 소녀는 쌩하니 가버렸단다. 형제·자매 없는 외동딸에 자식들은 모두 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고 많은 지병에 시달리는 친구였으니 당연히 벼락 맞은 기분이었을 거다. 뒤쫓아가 상세히 물어보고 싶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왔다며 심란해하던 친구는 며칠 뒤 앓아누웠다.

신들린 어린 소녀가 반말로 혀를 차며 단명하겠다고 했던 친구는 그로부터 여러 해 지났지만 잘 버텨내고 있다.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터지고 저기를 막으면 여기서 터지는 고투를 겪으면서도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소녀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의학적으로 보면 친구는 벌써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열 손가락을 다 펼치고도 남을 만큼의 수술을 1년 단위로 하면서 그에 동반되는 갖가지 치료를 병행했으니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벌써 명줄을 놓았을 것이다.

친구가 큰 비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녀의 말처럼 하루하루 소리 나지 않게 덕을 쌓으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영세 상인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고 카드 대신 현금을 내밀고 서비스기사가 오면 그분들도 어느 집 가장일 거라며 극진히 대접했다. 명절이면 아파트 경비아저씨와 청소아주머니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꼭 쥐여 드렸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자기 남편 회사에 취직시켜주며 엄마 손 못 미치는 아이들도 보살펴 주었다. 몸이 아픈데도 내색하는 법 없이 선행을 끝없이 베풀며 사는 친구의 모습은 내겐 구도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런 친구에게 하나님도 옷자락을 펼쳐 큰 비를 막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 힘으론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과 종종 부딪힌다. 아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로병사가 있는 인생을 살면서 수위를 넘는 범죄가 속출하고 청년 실업률이 급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어느 효자에게 임금이 상을 내리자 이웃에 사는 불효자가 자기도 상을 타려고 효자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고 한다. 임금은 그 불효자에게도 상을 내렸는데 이유인즉 억지로 따라한 효도일지라도 상을 받아 마땅한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의 말을 들은 나무가 독설을 듣고 자란 나무보다 훨씬 어여삐 성장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 기도처럼 건강하게 사는 친구를 보면서 나 또한 친구를 흉내라도 내며 산다면 내 머리로 쏟아지는 소나기도 하나님이 조금은 가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본다. 설령 그것에 억지가 있다 할지라도 친구를 계속 따라하다 보면 내 마음속 나무가 조금 더 예쁘게 커 줄 거라는 확신은 있다.

그런데 친구가 만난 그 소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태산 같은 나는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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