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 조순희 전 푸른솔문학회장
  • 승인 2023.09.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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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조순희 전 푸른솔문학회장
조순희 전 푸른솔문학회장

 

그리움에 사무쳐 편지를 쓴다. 노란 봉투에 담아 파란 하늘에 부쳐볼까, 꽃바람에나 실어 볼까. 네게 전하지도 못할 편지를 이렇게 쓰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주소조차 알 수 없는 친구야! 며칠 전 여행길에서 어느 가수의 `친구'라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 왜 그리도 네 생각이 간절하던지. 오늘따라 파란 하늘에 구름이 휘파람을 불며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구나.

저 구름이 산을 넘어 둥둥 건너오면 지나간 세월이라도 싣고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다니며 살아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소식이라도 올까, 행여 좋은 일이 있어 만나기라도 할까, 30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너의 생각에 오늘도 하늘을 쳐다본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있던 어느 날 해질 무렵 까만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서 멈춰 섰다. 갑자기 나타난 친구가 갈 곳이 있다며 나를 태워 간 곳은 어느 병원 원장실이었지.

평소에 네가 존경하던 원장님께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였는지 같이 일을 해보자는 원장님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단다. 그렇게 너의 빈자리를 내가 메우는 동안 너는 원대한 꿈을 펼치고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 네가 김포공항을 떠나던 날, 고국을 떠나는 너를 배웅하지 못하고 온종일 죄인처럼 먼 하늘만 바라보며 미안함에 시달렸었어.

한 번쯤 원장님께 말씀을 드려봐도 괜찮았을 텐데 직장인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외출 신청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소심한 성격을 원망하며 지금도 씁쓸하게 웃는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마음의 여유도 없이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국땅 어느 하늘 아래에서 친구도 나와 같이 우리의 추억을 기억하며 지금쯤 노년을 맞이하고 있을 친구를 생각하면 그리움에 코끝이 찡해 온단다.

비가 내려 집으로 갈 수 없을 때 시내에 사는 너의 집 네 방에서 함께 잠을 잤고, 실습 교재를 살 수 없어 애를 태울 땐 너의 어머니께서 내 것까지 챙겨 주셨지. 우리가 늘 걸었던 중앙공원, 같은 고향에서 같은 여중·고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을 다니며 언제나 떨어질 줄 몰랐던 애칭은 `괴산댁'. 우리 네 명은 하얀 가운을 입고 머리에 캡을 쓰는 가관식에서 선배님들로부터 촛불을 이어받으며 `나이팅 게일 선서'를 하지 않았니.

어느 날 새벽 이국생활 10년 만에 네가 연락도 없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눈앞이 캄캄했지. 일본여자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너의 모습은 임파선암에 걸려 머리가 빠졌다가 다시 자라는 중이라서 고슴도치처럼 짧은 머리에 목걸이·귀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어 예전의 네 모습이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었을까. 친정 가는 길에 잠시 들려 얼굴만 보여주고 간다던 너의 그 말이 또 한 번 마지막이 될 줄이야. 우리가 우정을 노래하며 바라보았던 그 하늘은 그 빛 그대로인데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세월이 흐를수록 내게 필요한 것은 친구라는 것을 요즘 실감하고 있다. 지난 세월은 이제 기억 속에 묻어두고 너의 손을 잡고 인생 여정을 떠나고 싶다. 사는 것이 너무나 힘에 겨웠을 때도 나는 너를 떠올렸고 좋은 일이 있어도 너를 생각했다. 너는 내 가슴에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그리움의 실체였다. 내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네게 다하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고국에 돌아온다면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꽃무늬 베개와 공단 이불을 꿰매 놓고, 너를 위한 잠자리를 준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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