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 숙주 김치 짠지
녹두 숙주 김치 짠지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09.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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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시인협회 행사가 있어 청남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낭성면의 한 도로를 지나칠 때 동승한 다중씨가 불쑥 꺼낸 말이다.

“이곳이 고령 신씨 집성촌인데, 신숙주 후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숙주나물을 먹지 않는다네요.”

“설마.”

나이가 들수록 콩나물보다 부드러운 숙주나물이 더 좋은 건 순전히 내 기준이라 무심한 나의 대꾸에 “콩을 싹 틔운 것이 콩나물이죠? 녹두를 싹 티운 것은 뭐라 해요?”

“녹두나물.”

“아니죠, 숙주나물이라고 하지 않나요?”

“아, 숙주나물!”

“그러네, 녹두나물이 맞는데 왜 숙주나물이라 할까요?

세종의 믿음과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면서 하루아침에 변절하여 세조의 사람이 된 신숙주는 오랫동안 재상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절개나 충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던 사회에서의 그의 변절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오죽했으면 힘없는 백성들이 쉬이 변하는 녹두나물에 빗대어 신죽주를 비웃고 나섰을까?

윗대 한 어른의 씻을 수 없는 그릇된 행동이 후손 대대에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본보기 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까지 등재되어 후손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있다.

요즘 정치판의 어지러운 소식들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신숙주의 고변에 희생당한 사육신 집안에선 억울하고 괘씸한 나머지 녹두나물을 쳐다보지도 먹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신숙주 집안 후손들이 숙주나물을 먹지도 않고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왜 그럴까. 속죄하는 마음일까, 아니면, 차마 조상을 씹을 수 없어서일까?

다중씨는 명문인 안동 김씨 후손이다.

그 유명한 조선의 독서왕 김득신이 윗대 할아버지라고 소개하면서, 자신도 할아버지를 닮아 60년을 헤매는 중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김득신, 머리가 영특하지 못함을 알고 피나는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한 노력형 인물.

그는 남이 한 번 읽고 아는 걸 100번을 읽어 깨우치는 둔재였으나 우공이산의 노력만큼은 국내 제일임을 만천하에 알리듯 뒷방 늙은이로 물러날 나이인 50줄에 출세하고 80여세까지 활동을 했다니….

그는 백이전을 일억 일만 삼천 번이나 읽고, 그것을 기리기 위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한 그 유명한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시민 장군을 아들로, 손자는 낭봉집을 쓴 <김치>이시다.

“우리 집에서는 김치 안 먹어요.” 하는 다중씨

“우리나라 사람 치고 김치 안 먹는 사람 어디 있냐고요. 순 거짓말!”

“짠지만 먹어요”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김치 말고 짠지 가져와라”

“할아버지를 어떻게 먹냐고요.”

그럼, 신씨네 후손들도 숙주나물은 먹지 말고 녹두나물 먹으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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