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죄와 벌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9.1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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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못다 한 사랑이 운다. 좋은 시절 다 지나서 이제야 찾아온 사랑. 사방에서 날아온 질타의 바람이 여린 꽃망울을 사정없이 흔든다. 버티던 꽃대가 무게가 버거워 끝내 “툭” 꽃송이를 떨군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애달픈 낙화. 두 사람의 마음에 혈흔이 배인다.

조카는 맨 처음 그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는 막내외삼촌이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기쁜 마음에 축하를 건네자 돌싱이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를 해 주는 분위기였다. 이어 중학생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이의 반가워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힘들게 꺼낸 말일 텐데 틈도 주지 않은 채 강하게 밀어붙였다. “포기해” 단호했다.

삼촌의 허락이 필요했던 건 아닐 터, 먼저 그이의 반응부터 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날부터 그이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집안에서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가졌다. 둘을 그냥 두고만 있으려니 걱정이 되는가 보았다. 같은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지날수록 가까워지는 건 당연지사다. 이 사실을 큰 시누이가 알면 받을 충격이 어마어마하다. 끙끙 앓는 그이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이는 그 후로 조카와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잦아졌다. 큰소리를 치다가 부드러운 소리로 어르고 달랜다. 보다 못해 나는 둘이 불륜도 아니고 미성년자도 아닌데 너무 간섭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대도 아니고 30대도 아닌 조카의 인생을 믿고 지켜보면 안 되느냐는 말에 역풍으로 돌아온 화가 태풍급이었다. 말 같은 소리를 하라는 것이다. 양보하여 다 괜찮다 해도 아이가 있는 것은 누구도 용납하지 못할 조건이라고 했다.

때마침 그이에게 지인이 운영하는 인력사무소를 넘긴다는 소식이 들렸다. 놓칠세라 얼른 잡아두었다. 전에 이런 일에 관심이 있던 조카를 시킬 요량이었다. 다행히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이는 가까이 있는 둘을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거자일소(去者日疎)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이로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일사천리로 몰아치는 모습이 나조차도 말리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속을 모르는 큰 시누이와 시매부의 태클이 들어왔다. 무슨 일을 그리 급히 서두느냐고 오해까지 했다. 그쪽에서 무슨 구문이라도 받았나 하는 엄청난 곡해에 힘들어했다. 조카의 사업보다도 둘의 사랑을 깨려는 악역에 더 충실한 죄였다.

외국인 며느리도 안된다는 두 분이 받을 쇼크가 걱정되어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긍정적인 조카 덕분에 인력사무소 계약을 잘 끝냈다. 그이는 신경을 쓴 탓인지 혈당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이제 한시름을 놓는 듯했다. 한 달 후면 서울에서 내려와야 하니 덜 불안한가 보았다.

꼬리도 길면 잡히는 법이다. 조카의 비밀연애가 큰 시누이에게 발각되었다. 두 분은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을 끊어버리자고 핵폭탄을 터트렸다. 집안의 어른들도 짠 것처럼 모두가 반대다. 총각에게 아이가 딸린 돌싱은 절대 안 된다고 난리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이 오는 일이라서 사태는 요란하다. 조카를 죄인 취급한다. 어른들의 성화에 시달린 푹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조카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품은 첫사랑이다. 사랑이 죄는 아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찾아온 탓이다. 단지 허락할 수 없어서 죄가 된 사랑. 누가 단죄할 수 있을까. 이별의 아픔을 벌로 견디는 조카의 인생에 악역을 맡은 그이나 방관한 내가 원망으로 남지 않기를. 이 일로 하여 부디 먼 훗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떠나간 아픈 자리에 새로운 사랑이 눈부시게 꽃을 피울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조카에게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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