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모정
벌레의 모정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3.09.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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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숲길을 걷는데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상큼한 바람이 볼을 스칠 때 도토리를 매단 나뭇가지 하나가 내 앞으로 사뿐히 떨어진다. 자식 사랑이 끔찍한 도토리거위벌레라는 곤충이 떨어트린 가지다. 땅속에서 월동하는 애벌레를 위해 미리 땅에 떨어트려 놓는 것이다.

몸 전체 길이가 1㎝ 정도의 작은 이 곤충은 주둥이가 길게 삐죽이 나와 있다.

이 주둥이는 새끼가 안전하게 살아갈 집을 지을 때 건축 도구로 사용한다.

가장 살찐 풋도토리를 골라 긴 주둥이로 깍지를 파고 또 파 구멍을 뚫는다. 그 구멍에 긴 관을 삽입해 산란한 뒤 뚫을 때 나온 부스러기로 단단히 구멍을 막는다. 알이 부화할 때까지 천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삐죽이 나온 그 작은 주둥이로 서너 시간을 쉬지 않고 톱질한다. 산란한 가지가 정교하게 잘려 땅으로 떨어진다. 널찍한 이파리 덕분에 도토리 속 알은 충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땅에 떨어지고, 5일쯤 지나면 알에서 깨어난다. 애벌레가 된 곤충은 도토리 속 과육을 다 먹어 치운 다음 깍지를 뚫고 나와 땅속으로 들어가 월동한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이렇듯 철저히 준비하는 그 작은 곤충의 지극한 사랑에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종족 보존을 위한 산란이 끝나면 도토리거위벌레는 생을 마친다.

자식을 키우느라 모두가 이렇듯 노력하고 있는데 다른 새 둥지에 숨어들어 알을 놓아놓고 날아가 버리는 새가 있다.

두견이, 뻐꾸기가 탁란하는 과정을 TV로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아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탁란하는 새만도 못한 사람도 있었다.

얼마 전, 비정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어린 3남매를 두고 재혼해 54년간 연락을 끊고 산 80대 친모가 아들의 사망 보험금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두 살 된 아기를 버리고 나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어머니가 아들이 사망하자 나타났다.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의 사망 보험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비정한 어머니는 법정 다툼 끝에 1심에서 승소했다니 남의 둥지에 새끼를 낳고 가버리는 새보다 못한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1cm의 작은 몸으로도 새끼의 안전을 위해 온갖 장치를 하는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만으로도 따뜻함이 배어 나오는 이름이 엄마다.

나도 어린 시절을 엄마 없이 성장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어린 시절을 얼마나 외롭게 보냈을지 짐작한다. 할머니가 지어준 솜옷을 입어도 늘 가슴이 시렸고, 그리움은 점점 커갔다.

엄마가 아니면 결코 채워 줄 수 없는 모정, 그 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어릴 때 헤어진 엄마를 30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낯설고 서러웠지만, 유전자의 이끌림 때문인지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눈높이 또한 같다는 것에 서로 놀란다.

길가의 풀씨가 영글고, 열매는 하루가 다르게 속을 채워가는 계절 가을 문턱. 한낱 미물에 불과한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정에 숙연해지는 숲길 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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