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 즐거움을 주는 나무
한없는 즐거움을 주는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9.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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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여전히 재잘재잘 새 소리에 잠에서 깬다. 창 너머 건물 사이는 아직 지난밤의 색조다.

시간은 아직 6시가 되려면 멀었는데, 이 녀석들은 잠도 없나? 온종일 쏘다녔으면 피곤할 만도 한데, 뭐가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정신이 없다. 시끄럽게 재잘거리던 소리가 잠시 멈춘 듯싶더니 동이 떠오르는 듯하다. 등 뒤에 무뎌진 용수철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뜰에는 어제 못다 한 작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분 분갈이를 하려 사 둔 마사토, 상토 자루가 잔디를 짓이기고, 선인장을 옮겨 심으려 준비한 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사물이 잘 보이지를 않는다. 모기는 새벽 마중을 반갑게 하고, 모기를 떨쳐버리려 팔을 휘둘러 가며 느린 동작으로 분갈이한다. 그래도 공기는 상쾌하다.

새벽의 촉촉한 공기가 코에 들어온다. 상긋한 초록 내음이 가슴속에 스민다.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작업의 속도를 높인다. 번식을 위해 삽목한 관엽식물과 자구를 떼어 뿌리를 내린 선인장을 옮겨 아주 심을 요량이다.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왔다 갔다 하던 길을 하얀 부추가 막아 세운다. 짙은 초록 위 하얀 융단을 펼쳐 놓았다. 정사각형의 카펫이 공중에 떠 있다. 무릎 위 높이로 떠 있는 하얀 카펫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황홀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는 사이, 콧속으로 진한 향이 터널의 마지막 막힌 벽을 뚫듯 세차게 들어온다. 달고 깊은 향이다.

이 향은? 분명 전에 알던 향인데? 이리 몽환적일 수 있을까? 앞은 온통 초록인데? 지난해, 겨울이 시작되기 전, 길을 걷다 버려진 화분을 마주하게 되었다. 모종하는 비닐 화분에 심겨진 식물, 완전히 말라 죽어 잎은 갈변하고 가지는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구입해서 키우다 죽어서 버렸나 싶었다. 그 옆으로 같은 상태의 화분이 한 자루다. 지나려는데 한 조각의 초록잎이 걸음을 세웠다. 뒤돌아서 한 조각의 초록을 찾아냈다. 속에는 아직 살아 있는 녀석들이 들어 있었다. 가지는 찢기고 부러지고, 잎은 모조리 떨어졌다. 혹시나 싶어 헤집어 보았다. 아직 가지가 초록빛을 띠고 있으니 분명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집으로 걸었다. 땀이 스멀스멀 벌레가 기는 듯하고, 종아리는 경련이 일어날 듯했다. 차를 가지고 버려진 자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흙과 버려진 화분이 뒤섞여 있어 먼 거리를 들고 오긴 어려웠다.

집에 도착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어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부러진 가지는 잘라내고 뿌리가 상하지 않게 커다란 화분에 옮겨 심었다. 올봄 몇몇이 견디고 견뎌 살았다. 일제히 싹을 올리고 이제 엄지만 한 꽃봉오리를 올렸다. 너무나 포동포동한 녀석들이 곧 팝콘 터질 듯한 기세다. 건강한 짙 녹색의 사탕 같다.

그 많은 녀석 가운데 한 녀석이 먼저 꽃을 피웠다. 새하얀 꽃 하나가 어렴풋한 새벽의 공기를 휘젓고 있다.

청초하고 새하얀 장미를 닮은 녀석은 그래서 여름이 가는 것을 잡고 있었나 보다. 온전히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려 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마지막 여름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 시간의 공간에 빠져 작업은 잊고 녀석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른다. 반복적으로 코로 들이키는 향은 지나간 여름의 태양을 품었다.

선택되어 한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같은 시간대에 다른 시간을 기록하며 살던 것이 비참하게 버려졌다. 버려진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다시 거두어진 것도 의지가 아니었다.

많은 것이 꽃을 떨구고 씨를 담았다. 뒤늦게 꽃을 피워 새하얀 솜사탕이 되고, 짙은 노랑의 열매가 될 때까지 품었던 향을 한없이 품어낼 것이다. 아주 즐거운 나날을 즐길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집안은 온통 `샤넬'의 `가드니아'를 뿌려 놓은 몽환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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