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고수들의 가치
은둔 고수들의 가치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9.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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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대학 시절 내가 몇 달 동안 풀지 못해 끙끙대고 있던 문제를 불과 한두 문장으로 쉽게 해결했던 교수들을 보면서 경탄했던 적이 있다. 이런 교수들은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과거에 고민을 해서 풀어본 것이다. 정말 존경할 만한 인품과 해박한 학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왜 밖으로 나가 사회를 이끌어가지 않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인간들만이 나와서 설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뛰어난 사람들은 나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숨어 있는 고수 때문에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난 최근에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되는 지극히 섬세한 작업이다. 정말 명확하지 않으면 백날 해봐야 헛고생이다. 예를 들어 마음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 몸과 마음에 긴장을 풀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게 몸과 마음에 긴장을 푸는 것일까? 긴장을 푸는 데는 주의 집중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주의를 집중하라고? 어디에 집중하지?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하기 때문에 경전을 뒤져본다. 가장 먼저 우리말 경전을 뒤져본다. 더불어 영어 번역도 찾아본다. 한문으로는 어떻게 번역이 되어 있을까? 이렇게 찾다 보면 한글, 영어, 한문이 각기 대강은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글 번역 안에서도 천차만별이고 영어 번역도 여러 버전이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방법이 달라지고 파가 갈리고 그야말로 중구난방이 된다.

이 미묘한 차이는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공부하던 사람의 습관 때문에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가 궁금해진다. 심심풀이로 빠알리 원문을 찾아보니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다. 빠알리어를 배우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저기를 뒤져보니 유학파, 국내파 고수들이 나 같은 초보를 위해 기초부터 배울 수 있는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놨다. 열심히 들으며 배우고 있다. 이런 고수들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예전에 희랍어를 마땅하게 배울 곳이 없어서 미국에 갔던 생각이 난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안방에서 공짜로 기초를 닦을 수 있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지만 존경스럽고 고맙다.

언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닦으면서 원전을 읽는 게 좋다. 그래서 왕초보이지만 빠알리어 원전 강독 팀을 수소문해봤다. 마침 아는 동국대 교수가 있어서 동국대 대학원생들이 하는 빠알리어 강독 모임을 소개받았다. 그야말로 낑낑대면서 쫓아가고 있는데 이 모임에도 숨은 고수가 있다. 고전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원전 해석의 엄밀성과 수행자로서의 마음가짐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많이 배우고 있다. 젊은 사람이지만 존경스럽다. 곳곳에 머리 큰 놈들이 있으니 항상 조신하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 닿는다.

공부를 하면서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있다. 배우는 것으로는 안 되고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실천의 과정에서 앞서 해본 사람들이 중요하다. 여기에도 고수들이 있다. 한발 앞서서 내가 한 방황을 해본 사람들이기에 내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한다. 이런 진단과 처방은 몇 년 정도의 시간을 벌어준다. 이렇게 앞서 간 사람들이 나의 고수이며 내가 고마워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관심 영역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고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산다. 이게 나만의 일일까? 사회의 전 영역에서 몇십 년 동안 한우물을 판 고수들이 있고 이들의 노하우가 후속 세대에게 전수되고 있을 것이다. 사회의 기반은 사실 이런 숨어 있는 고수들 때문에 탄탄해진다. 이런 숨어 있는 고수들이 있는 한 정치인들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나라는 안 망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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