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세기 이모님
식세기 이모님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3.09.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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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아쉬운 밤이다. 여행 마지막 날이면 왜 늘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 한편에 `집에 가기 싫다'라는 생각도 떠오르는 걸까.

혹시 일상으로의 복귀 안에 표시도 안 나면서 힘은 힘대로 드는 가사노동이 포함되어 있어서인 건가? 엄마와 함께 인도네시아 발리에 와 있다.

요 며칠 밥하고 빨래하는 일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푹 쉬었더니 하늘 아래 부러운 사람이 없다.

처음엔 동유럽으로 가 볼까 했다가 팔순이 넘은 엄마께는 무리일 듯싶어 목적지를 휴양지로 바꿨는데 너무 잘한 것 같다.

오전 내 해변과 풀장을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돌아와 보니 오늘도 역시 신발과 침대 시트가 얌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욕조에 걸쳐둔 젖은 수건 대신 선반에는 보송보송한 새 수건이 잘 개어진 채 올려져 있고, 나갈 때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가운도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기분 좋으면서도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지 황송한 마음이 드는 건 몸에 밴 무수리 근성 때문이리라.

엄마도 우리가 어질러 놓은 걸 다른 사람이 치워 주니 괜히 미안한 것 같다고 하시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모전여전인가 보다.

작년 추석 딸들이 집에 왔을 때, 맞벌이하는 애들 친정에서만큼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설거지를 했다.

작은딸이 그 상황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요즘은 다들 설거지해주는 `식세기 이모님'을 따로 둔다며 넌지시 봉투와 함께 식기세척기(식세기) 모델 몇 개를 추천해주고 갔다.

그때는 많지도 않은 설거지에 그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일축했었는데 딸들이 돌아간 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 듯싶었다. 제집에서 식기세척기를 쓰니까 설거지하기는 싫었을 거고, 그렇다고 엄마가 하는 건 또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생각 끝에 `딸들 마음 편하게' 나도 식세기 이모님을 들이기로 했다.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나서도 어쩐지 직무유기 같아 선뜻 사용하질 못했다.

그즈음 박완서의 `여가와 여자'란 글에서 전기밥통과 세탁기는 밥하고 빨래하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바쁜 여자에게 주어져야 했는데, 살림만 하는 여자들에게 그런 게 주어지고 보니,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 해 정신질환이나 주부도박 같은 탈선 문제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며, 그럴 바엔 불 때고 손빨래하던 시절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한다는 내용을 공감하며 읽었다. 실제로 평일 낮에 카페에 가보면 대부분이 여자들인 게 같은 맥락으로 좀 민망하던 차였고. 그래서 애들 왔을 때나 쓰겠거니 했다.

그런데 한번 써 보니 웬걸,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설거지는 물론 뽀득뽀득하게 살균 건조까지 해놓는 솜씨가 여간 맘에 드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밥 먹고 난 설거지를 전부 이모님에게 맡기고 바로 다 같이 둘러앉아 다과를 나누며 담소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거의 매일 야무지게 부려 먹고 있다. 이모님이 설거지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책상 앞에 앉으면 내게 24시간 외 추가 시간이 주어진 듯해 진짜 기분이 좋다. 그럴 때면 이 선물 같은 시간을 감사하며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무척 바빠질 것 같다. 2학기 강의 준비에, 추석 명절에, 하반기 평생학습 강좌도 신청해 놓았다. 무엇보다 책을 좀 많이 읽어야 하는데, 열심히 살아낼 수 있겠지? 충분히 힐링했고, 식세기 이모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엄마 건강하실 때, 일 년에 한두 번은 모시고 여행을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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