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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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8.3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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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지인의 칠순에 초대되었다.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케이크를 사 갔다.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운 인사로 시끄럽다. 거한 식사를 마치고 케이크의 초에 불을 붙여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촛불이 “후”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자 그녀가 봉투를 하나씩 내민다. 모두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하자 선물이라고 한다. 그 안에 자그마치 십만원이나 들어있다. 받는 손이 부끄럽다. 그녀는 신앙을 접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니 허무하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억척스럽게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던 자신이 말이다. 어느 날 옆에 있는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뜨겁게 올라왔다고 한다. 주위의 고마운 분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이렇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음이다. 그런 그분의 표정이 밝다.

내가 20대에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방앗간을 운영하고 계신다. 거기에 아들도 사고로 몸이 불편하다. 남편도 갑자기 쓰러져 모든 게 어눌하다. 꽤 부자인데도 하루를 쉬지 않고 가게를 연다. 소문난 수전노이기에 이런 마음을 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안다.

봉투를 받아들고 오는 내내 생각이 깊어진다. 지금까지 받아본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듯하다. 돈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소중한 인연의 끈을 이어 온 대가. 이보다 더 뭉클한 선물이 또 있을까. 오늘 하루는 인연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어 돈보다도 소중한 시간이다.

돈은 나에게 힘든 기억이 더 많다. 긴 시간 동안 비참하게 나를 괴롭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까지 끌고 갔었다.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무조건 바둥거리기만 했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서야 팽팽한 힘이 빠진다. 저항할 힘이 없어서인지 그때부터 긍정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세월은 어느새 나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돈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처음으로 찬란한 계절을 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차마 그만두지 못했던 직장을 망설임 없이 명퇴하였다. 그이가 아팠을 때 병원비를 걱정 안 해도 되어서 좋았다. 아들이 미국으로 떠날 때 스스럼없이 자금을 보태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야 비로소 살맛이 났다.

돈은 마치 도자기를 연상시킨다. 온 정성을 오래 들여 구워내는 것처럼 돈을 벌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똑같은 가마에서 구운 도자기라도 천차만별이다. 반 이상이 깨져 나간다. 아주 드물게 불의 작품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오묘하고 영롱한 빛감이나 문양이 생기는 요변(窯變)이다. 희귀성으로 명품 대접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불에도 여러 모습의 도자기가 나오는 것처럼 돈은 주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돈을 버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된다. 어쩌다 남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하는 요변도 본다. 돈은 뜨거운 불을 견딘 도자기처럼 돈이 되지 않는 시간조차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이는 건물을 지어 자기 사무실을 갖는 게 꿈이다. 매매로 나와 있는 땅이 있어 살 요량으로 알아보았다. 헉! 이럴 수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도 면 단위에 있는 땅을 200평도 살 수가 없다. 돈 앞에 또 한 번 좌절한다. 큰돈이라 생각했건만 배신당한 기분이다. 이는 욕심을 낸 까닭이다. 대출을 받아서 살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사지 않기로 했다. 빚을 지는 순간부터 돈의 노예가 될 것 같아서다. 이제 돈 앞에 절절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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