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근대건축기행·순례지 조명
충북 근대건축기행·순례지 조명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8.30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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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⑥ 선교와 계몽교육의 본체 `탑동 양관'
1906년~1932년 6개동 건축 … 붉은벽돌로 마감
밀러 목사 파견 … 미션스쿨 설립 선교·계몽교육
유치원·기숙사·병원·행사장·청년모임 등 활용도
양관 4호 1906년 가장 먼저 건축(청주옥 화강석을 사용).
양관 4호 1906년 가장 먼저 건축(청주옥 화강석을 사용).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익숙한 것에 대한 향수도 커진다. 중학교 시절 3년간 학교를 오르내리며 봤던 탑동 양관도 그런 곳이다. 학교 건물 사이에 있던 붉은벽돌집은 늘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돌계단과 격자 창문, 아치형 현관은 한옥만 봐왔던 우리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미션스쿨이 무슨 의미인지, 학교에 왜 목사선생님이 있고, 매주 한 시간씩 성경 공부를 하는지 의아해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특별활동시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던 양관 건물에서 사춘기 여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예절교육을 받았던 기억은 건축물만큼이나 아득한 시간이다.

40년 세월을 뒤로하고 탑동 양관을 찾았다. 현대건축물로 들어찬 교정에서 6개의 붉은벽돌집 양관(洋館)을 보기 위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발길을 옮겨야 했다. 주말을 이용해 순례지 방문에 나선 교인들의 모습도, 근대건축문화 기행에 나선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1호부터 6호까지 양관은 100여 년 청주 근대교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이다.

양관 5호-연려회 청년조직(1938년).
양관 5호-연려회 청년조직(1938년).

이처럼 학교 안에 서양의 붉은벽돌집이 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 군국주의로 무장한 서방 국가들이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조선은 개화기를 맞는다. 이때 기독교 전파를 위해 서양 신부와 목사가 파견되면서 선교를 위해 시민을 대상으로 계몽교육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890년 이후에는 미션스쿨 건립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조선의 전통교육에서 벗어나 서구식 신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청주 역시 종교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1895년 미국 북 장로교회에서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견한다. 그가 바로 밀러 목사다. 청주의 미션스쿨과 탑동 양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밀러 목사는 1904년 청주읍성 남문 밖 100미터 거리에 광남학교(청남초등학교 전신)를 건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해 신교육을 담당했다. 이어 창신여학교, 청서학교, 창동학교, 청북학교 등 6개 학교를 건립해 운영하면서 청주 시민들의 계몽교육을 담당했다. 미션스쿨이 늘면서 많은 선교사가 청주를 찾았고,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이 필요했던 밀러 목사는 1904년 탑동에 건축 부지를 마련하고 집을 짓는다.

양관 3호-미군환영행사 합창단 모습(1945년 10월).
양관 3호-미군환영행사 합창단 모습(1945년 10월).

거주 공간으로 건립된 양관은 1906년부터 1911년까지 5개가 지어졌고, 마지막 양관이 1932년에 건축됐다. 모든 양관 건물은 붉은벽돌로 마감했지만 건축 시기가 조금씩 달라 건축적 특성도 차이를 보인다. 그중 실내공간에 사용된 자재들은 우리나라에 없던 철물류를 수입해 설치한 것들로 초기 한국의 근대건축 변화상도 엿볼 수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양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양관 1호는 학교 밖에 주택가에 있다. 이 건축물은 일신학원을 설립하며 부족한 자금을 조성하려 매매하면서 유일하게 개인 소유가 됐다. 일반 주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찾기는 어렵지만 당시 건축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양관4호-청주교대 기숙사 사용(1942년).
양관4호-청주교대 기숙사 사용(1942년).

2호 양관은 1932년 가장 늦게 건축됐다. 하지만 양관 중 유일하게 지금도 운영하고 있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대한예수장로회 충북노회가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교육의 맥을 잇고 있다.

3호 양관은 밀러 목사 가족이 살던 집으로 1911년에 건축되었다. 옛 사진 속에선 유치원과 행사장으로도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외관을 돌다 보면 돌무더기로 된 기초석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 돌들은 다름 아닌 청주읍성 성돌이다. 성이 훼철되면서 양관의 기초석으로 남아 100여 년 전에 벌어진 지난한 역사를 보여준다.

4호 양관은 한옥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양관 중 가장 먼저 건축된 이 집은 1906년에 건립되었다. 한옥과 양옥이 결합돼 초기 근대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기초석으로 사용된 돌은 중앙공원 인근에 있던 감옥(청주옥)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사라진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한때 청주교대 기숙사로도 사용된 4호 양관 앞에는 밀러 목사의 묘와 기념비가 세워져 그의 선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

탑동 양관3호-유치원(1948년).
탑동 양관3호-유치원(1948년).

 

5호 양관은 1911년 성경학교로 지어졌다. 학교건물로 지어져서인지 다른 건물에 비해 높고 크다. 소민병원 노두의 병원장과 의사, 간호사, 선교사들이 사택으로 사용했지만 지역 청년들의 교육과 모임의 장으로도 사용됐다.

6호 양관은 청주 최초의 근대식 소민병원이다. 진료실과 수술실을 갖추고 병상 20개도 갖춘 병원으로 어려운 처지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현재 병원 앞마당은 학생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지역민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새로운 시대상을 제시해 준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청춘을 보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이상 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다채롭게 청주에서 꽃을 피웠다. 선교와 교육 활동으로 신교육을 전해주었던 선교사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100년 세월을 기억하듯 양관 건물마다 그들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붉은빛을 간직한 건축물들은 100년 전 시대를 앞서온 선교사들의 빛나는 정신을 담고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종교의 순례지나 근대건축유산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확장해 청주 근대교육의 본체로써 탑동 양관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연지민기자

annay2@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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