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왕징과 왕십리
어느 겨울 왕징과 왕십리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08.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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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뜨거운 여름 한복판에서 겨울 북경을 떠올려 본다.

9층 아파트 창문 너머로 햇살이 내리쬐는 시가지가 보인다.

잘 정비된 쓰로우(4로) 위로 차들이 밀려가고 밀려들고 있지만 지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차들이 바쁘게 지나다닌다는 것이 유일한 움직임이다. 살아있다는 것, 숨 쉰다는 것, 북경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움직임은 의욕이고 희망일 것이다.

삭막한 풍경, 눈 내리지 않는 겨울 풍경은 어디나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이방인인 내 느낌은 더욱 스산하고 암울하다.

이곳은 건조하다.

김을 접시에 그냥 담아두어도 눅눅해지지 않을 만큼, 대륙의 차갑고 건조한 바람만 부는 이곳, 수은주는 급강하, 중앙난방의 미적지근한 집안 온도는 18도에서 20도를 오르내리고 있어 전기난로를 켜두거나 전기장판을 켜둔 침대 속에서 창밖 풍경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왕징은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이다. 그것도 정체되어 있는 코리아타운이 아니라 한때는 한국인의 숫자가 매년 30%씩 급증했던 코리아타운이다.

왕징이 아시아 최대의 신도시로 개발된 지역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공항과 시내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아파트단지가 건설되면서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다. 쓰취(4구)나 싼취(3구)에 속하는 왕징은 한국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왕징(望京) 한자를 풀이해 보면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 된다. 서울(베이징)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 불현듯 십 리만 더 가서 수도를 정하라고 했던 무학대사의 말이 어원이 되었다는 왕십리가 떠오른다.

나날이 발전하는 놀라운 베이징을 바라보아야 하는 곳. 한국인을 영원히 이방인으로 머물게 하는 조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지명이다. 건조하고 메마른 북경의 왕징에서 왕십리를 떠올리다니….

내 집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지나 동대문 운동장….

살기 바빴던 잊어버린 기억을 이곳은 상기하게 한다.

여기저기 조형물과 벽보와 깃발이 나부끼고 있고 혹한인데도 북경 전체가 공사장이 되어 있다 해도 나는 이방인이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차라리 함박눈이라도 쏟아졌으면 조금은 덜 춥지 않을까?

서울은 폭설이 내렸다는데, 나는 왕징에서 왕십리를 생각한다. 소월을 생각한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김소월의 시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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