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고래
아버지 고래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8.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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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가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가라앉는 새끼를 머리로 밀어 올리며, 어미는 몇 날, 며칠 새끼를 등에 업고 다녔다. 죽은 새끼를 등에 업고 안절부절 안간힘을 쓰는 어미의 등을 보며 나도 땀내 나던 어떤 등 하나를 생각해냈다.

아버지의 직업은 칼갈이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시내로 놀러나가면 종종 아버지와 마주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던 아버지의 회색 모자, 구정물 묻은 바지, 칼을 가느라 들썩이던 등, 그 등만 보면 나는 같은 극을 만난 자석처럼 뒷걸음질 쳐 달아나곤 했다. 사춘기 아이의 철모르던 행동이었다고 치더라도 나는 그 때의 내가 아직도 죄스럽기만 하다.

청주시내 칼갈이들 중엔 당신이 최고라며 아버지가 자부심을 가지고 하던 그 일도 중풍을 맞은 뒤론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다니는 자식만 넷이니 일을 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벽돌공장으로 일을 다니셨다. 마비된 손에 힘이 없어 벽돌을 떨어뜨리는 사고가 잦자 벽돌공장 일을 그만두고 닭 도살장으로 일터를 옮기셨다. 배운 것 없고 건강도 나쁜 당신에게 그나마라도 일자리가 있는 것이 다행이라며 아버지는 도살장 일을 꾸역꾸역 다니셨다. 그러나 도살장 일을 마치고 온 아버지는 피비린내가 남아있는 손을 몇 번이고 씻으며 토악질을 하시곤 했다. 성품이 여린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닭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일은 토악질을 해내야 할 만큼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환경들을 토해내느라 움찔대던 아버지의 등. 그 때의 나는 왜 그 등을 무심히 보아 넘겼을까?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부모자식 간에 나누는 당연한 정보다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건들이 주로 보도되다보니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대 악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죽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고래의 모성이 그래서 더 지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평생을 가난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인 자리에서 착하게 살았다는 것 밖에는 물려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자식을 키워냈음에도 물려줄 것 없는 무능만을 면목 없어하셨다. 이만큼 키워주셨으면 됐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해도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자식들 앞에서는 죄도 없는 죄인을 자처하셨다.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 이즈음의 나는 이해가 간다. 나 또한 최선을 다해 산다고 했지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미안한 부모가 되어 버렸다.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아픈 건 더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아버지도 그래서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다. 주고 싶은 마음은 하늘 만큼인데 줄 수 없는 당신이 많이 원망스러우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물려준 게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어찌 물려준 게 없겠는가? 돌아가신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느껴지는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의 힘만으로도 나는 순탄치 않은 인생행로를 비틀대지 않고 잘 살아낼 수 있었다.

이젠 꿈에도 한 번 나타나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오늘 밤 꿈엔 한 번 다녀가시기를, 잘 살아줘서 기특하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아버지 앞에서는 아직도 어린애가 되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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