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의 맛
노각의 맛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3.08.28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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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여름이 막바지에 와있다.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 좀 시원해졌으니 이제 더위도 한풀 꺾인 듯하다. 여름을 잘 견뎌왔다고 여겼건만 몸도 좀 지쳤나 보다.

입맛도 없고 그동안 즐겨 먹던 애호박볶음이나 찐 가지 반찬도 이제 심드렁해져 뭘 해 먹을까 하던 중이다.

엊그제 따다가 베란다에 둔 노각이 생각났다. 누렇게 익은 오이 껍질을 벗겨내어 반으로 잘라 숟가락으로 속을 파냈다.

썰어서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꼭 짜내야 한다. 겉보기와는 달리 많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 고춧가루, 파, 마늘을 넣고 무치거나 식초나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하게 무쳐도 좋다.

오독오독 입안에 씹히는 식감이 그만이다. 사실 파란 오이는 상큼한 향도 있고 무침이나 소박이, 냉국을 타서 먹으면 모두가 좋아한다. 그렇지만 봄부터 여름 내내 먹어왔으니 좀 싫증 날 때도 되었다. 반면 노각은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여름이 끝나가는 이때 잃어버린 입맛에 별 부담 없이 다가온다.

푸른 오이는 절대 낼 수 없는 맛이지 않던가. 사실 노각의 맛은 특별하지는 않다. 별맛이 없는 게 또 노각의 맛이다. 젊을 때는 이런 맛을 너무 밋밋하다고 좋아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맘때면 노각무침이 입맛에 당긴다.

봄에 모종을 심으면 초여름부터 오이가 달리기 시작한다.

물만 자주 주면 오이 넝쿨은 하루가 다르게 뻗어가며 노란 꽃잎을 매단 푸른 오이를 쑥쑥 키워낸다. 가뭄을 가장 많이 타는 작물이기도 하다.

장마에 집중호우를 오롯이 견디고 나면 뜨거운 태양 아래 가뭄이 이어진다. 시들시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잎사귀들은 생기를 잃어 누렇게 마른다.

노각 속을 파내다 보니 씨앗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비실비실 다 죽어가는 듯한 잎과 줄기는 영양분을 열매로 보내주며, 있는 힘을 다 소진하여 씨앗을 보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노각은 삶의 흔적 같은 껍질에 새겨진 줄무늬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듯하다. 마치 자신은 돌보지 않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헌신하는 우리들의 부모님 모습을 보는듯하다.

노각의 겉모양이 새롭게 보인다. 통통한 살집에 주름살처럼 얼기설기 실금이 새겨진 누런 껍질은 식물의 열매이기 전에 하나의 삶의 지침 같다.

그 몸에 언제 푸른 날들이 있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차 하다 거두어야 할 시기를 지나쳐 늙어버린 오이, 아니면 노각을 좋아하여 작심하고 노각 종자를 일부러 심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오이는 늙어가며 자신의 욕심을 다 비운 모양이다. 젊음의 향을 잃은 게 언제일까. 지나간 세월의 흔적들을 오롯이 받아들여 `노각'이라는 이름으로 마트 채소 진열대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위를 살펴보면 같은 연배들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취미생활을 즐기며 편안한 여가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베이비부머 세대'라 불리는 막 노년기에 접어든 우리도 때때로 의기소침해지고 점점 용기를 잃기도 한다. 노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다. 자식들이나 젊은 사람에게 배워야 할 문화나 기술도 많아진 시대이다. 그렇지만 노각만의 맛이 있듯이 많은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가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필요할 터이다.

욕심이나 자만을 내려놓고 한 발짝 물러나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삶이 되면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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