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익은 저 소리
귀에 익은 저 소리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3.08.24 1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어릴 적 새벽 단잠을 깨우던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잊고 산 지가 반백 년도 더 흐른 지금 어떻게 저 소리가 내 기억 속에 살아있지? 신묘막측한 일이다. 어디서 나지. 숨을 죽이고 다시 들으려고 귀 기울여 찾고 있는데 다시 이어진다. 가까이서 듣고 싶어 일손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찾는데 옆집이다. 담장 옆으로 가 얼마간 서성이니 또 들린다. 쓱싹 사각 쓱싹 사각 쓱싹 사각 당기고 미는 솜씨가 아버지가 새벽마다 들려주던 소리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저 소리.

저 소리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자장가로 들려 다시 잠들곤 했었다. 신기하게 이웃사촌에게서 잊고 살았던 아버지 소리를 듣다니 어찌나 반가운지 아버지가 부르는 음성 같아 몹시도 그리워 고여 있던 그리움이 뜨거운 눈물 되어 주르륵 흐른다.

앞으로 밀고 당기는 리듬이 일정한 강약으로 들린다. 푸근하고 안정감을 주어 악기의 선율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 같다. 어려서 새벽마다 잠결에 들을 때도 지겹지 않았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안한 저 소리였다. 어쩌면 아버지가 만들어 들려주던 소리와 그리도 똑같을까.

옆집 아저씨의 직업은 목수인데 어찌 평생을 농사로 사신 아버지의 단련된 노련한 낫 가는 솜씨를 따라잡을 수 있나. 성품이 같은가, 아버지의 연배가 되어서인가 반갑고도 참 신기하다. 요즘은 조상의 묘를 벌초하는 늦은 여름이다. 목수 아저씨는 낫으로 풀을 벨 요랑 인가 보다. 해 질 녘이니 내일 두 아들과 함께 한가위가 오기 전 부모님 산소의 잡초를 벨 계획을 하셨나 보다. 짧았더라면 못 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 자루의 낫을 긴 시간을 한결같이 끊어졌다 이어져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낫이 몇 자루 있다. 가까운 고향에 산, 밭, 논, 시부모님 산소가 있어 연장이 골고루 있다. 남편도 베란다에 앉아서 숫돌에 낫을 갈았었다.

자세는 그럴싸했지만, 쇠와 돌의 갈리는 소리는 들쑥날쑥 듣기가 심히 거북했다. 팔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옥 갈릴 때면 짜증스러운 소리가 일정하지 않아 한마디로 빨리 대충 해치우는 성미 급한 성의 없는 소리로 기억된다. 한 번도 남편 낫 가는 소리에서 아버지를 기억해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담장 넘어 목수 아저씨의 낫 가는 소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수없이 들려주던 그리움의 노래가 되어 가슴에 파고든다. 친정집은 일손이 모자라 마을 젊은 청년을 머슴으로 두어 가을에 쌀로 새경을 주기로 약조하고, 봄부터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일을 맡아 하도록 했다.

동이 트면 와 아침밥을 먹고, 일러주는 대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청년이 오기 전에 소죽을 끓이며 아궁이 앞에 앉아 온종일 쓸 낫을 다 갈아서 헛간 벽 줄에 걸어 놓으셨다.

낫 가는 솜씨만 노련한 게 아니다. 사람을 부리는 지혜도 노련했던 것 같다. 만약에 낫을 갈아 놓지 않으면 낫이 무디다는 핑계로 한낮에 숫돌 앞에 앉아 있으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겠지.

아버지는 어제 새벽에도 다음 날 새벽도 바가지에 물을 담아놓고 숫돌에 물을 뿌려가며 낫 가는 일로 하루를 여셨다. 갈다가 날이 잘 섰나 확인하려면 예리한 눈으로 낫 날을 싹 훑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숫돌에 문지른다. 그리하여 낫 가는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다시 끊긴다.

철없던 그 시절에는 꼭두새벽마다 쇠와 돌과 물이 만나 굵고 가는 긴 섬세한 울림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들려 단잠을 잤었는데, 아버지의 연배를 훌쩍 넘긴 지금 저 소리는 자식을 품은 가장의 곰삭은 체취가 듬뿍 담긴 애간장이 끊어질 듯한 처량한 소리로 들림은 왜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