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나기
  •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 승인 2023.08.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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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박창호 전 충북예술고 교장

 

나는 소나기가 좋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다. 하늘은 더 파랗고, 먹구름 끝자락 너머로 보이는 뭉게구름은 더 하얗다. 가는 여름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를 하고, 그 장단에 맞춰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햇살을 흔들어댄다.
문득 학창 시절에 읽었던 `소나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소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지식과 논리를 위해서만 읽어왔던 독서 습관을 걷어내고 이제는 오롯이 느낌만으로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데다가 청소년기에 시험을 목적으로 읽었던 것들을 목적 없이 순수하게 다시 한 번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헤아려보니 `소나기'를 읽은 지가 5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니 한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는 것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런데도 `소나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순수함'과 `아련함'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그려진다. 책을 다시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고 나니 내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소나기와 함께 떠올랐던 그 이미지가 어떤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몹시 궁금하고 설??다.
도서관에서 대출 신청을 했더니 오래된 책이라 보관자료실로 옮겨 소장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사서 선생님은 한참만에 보관자료실에서 책을 꺼내와 먼지를 닦고 낡은 표지 겉장을 테이프로 붙여서 건네주었다. 어렵게 빌린 책이라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도서관 한 켠의 정갈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근거린다.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책장을 펼치니 누런 종이 속에서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이야기들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징검다리에 앉아 있는 소녀, 길을 비켜주길 하염없이 기다리던 소년, 조약돌, 아름다운 갈밭과 햇살에 비친 하얀 갈대, 벌 끝 산 너머로 떠나는 소년과 소녀의 소풍, 허수아비, 그리고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 불어난 개울가, 소녀의 병치레….
까마득히 잊혀졌던 내용들이 책장에서 빠져나와 내 기억 속으로 돌아오면서 하나하나 자리를 잡았다. 소년이 송아지 등에 올라타는 장면은 한 폭의 수채화로 자리 잡았고, 소녀에게 주려고 덕쇠할아버지네 호두밭에서 몰래 호두를 따는 장면은 너무 안쓰러워 내 가슴을 후벼 파면서 커다란 구멍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내 50여 년의 세월 속에서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소설 `소나기'가, 그리고 소나기라는 단어와 함께 늘 같이 떠올랐던 `순수함'과 `아련함'이라는 이미지의 실체가 온전히 되살아나면서 복받치는 감정에 나는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책을 쓰다듬었다. 책을 쓰다듬다가 영영 전할 수 없게 된 소년의 주머니 속 호두를 내가라도 전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책장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세 번을 더 읽었다.
소나기가 내리면 시원한 느낌과 함께 청순하고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 좋다. 그래서 나는 소나기가 좋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다. 하늘은 더 파랗고, 먹구름 끝자락 너머로 보이는 뭉게구름은 더 하얗다. 가는 여름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하고, 그 장단에 맞춰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햇살을 흔들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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